Again 1907?

지난 7월 8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를 새로운 부흥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와 노력이 전 한국 기독교를 망라해서 진행되었고, 그 노력의 정점에 이 행사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부흥이라는 대전제에 찬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올해 읽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흥을 추구하는 목적이 성도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있다면,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다면, 부흥의 당위성부터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행사는 열리고 있는 것이니… TV로 생중계되는 것을 봤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말씀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히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오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1-3)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말씀을 하기가 차마 힘든 모습이었다. 자신의 삶을 헌신적으로 드리고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을 알고 있기에 힘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선언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뭐 대단한 고백도 아닐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행위 없음으로 연결되는 기가막힌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값싼 선언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수많은 목사님들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변개시키는 것이었다는 고백이 있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질책이었고,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으며, 그것은 곧 나를 향한 질책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정말 아쉬운 것은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듣기 싫은 말씀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행사를 계획하면 그렇게 된다. 한시간은 회개하고 한시간은 용서를 선포하고, 그 이후에는 비전을 나누고… 뭐 대강 이런 식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철저해야 할 회개의 시간은 그저 잠시의 가슴아픔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나운서들에 의해 진행된 뒷 순서는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멘트로 치장되고 있었다.

단상에 올라와 말을 했던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철저한 회개,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에서 나타난 전인적이고 철저한 회개가 이번 집회에서 이루어졌는가? 물론 이 집회의 규모와 특성상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회는 그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에 ‘이랜드 기도실’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려 있는 댓글들… 기독교인들의 위선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했고, 그런 댓글들이 모두 높은 찬성을 받고 있었다. 최근에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볼 수 있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틀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고, 오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욕을 먹고 있었다.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면서, 삶 속에 어떻게 공의를 실천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아니 아예 그런 고민 자체를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지금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냉혹한 삶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흩어져서 고립되어 있다. 내가 느끼고 있는 무기력함은 아마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 대신 부동산 투자에 대한 책을 탐독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아득한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흥은 이런 철저한 무기력함의 고백에서 시작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내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더 깨져야 하고, 좀더 무너져야 한다. 내 생각과 방법이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무너지고, 더 많이 부서지는 것이다. 한 번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은, 1907년의 부흥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