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호 특집 이야기

내가 이른바 ‘복음주의 진영’이라는 곳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덕분인걸까? 복음과 상황4월호 특집으로 들고 나온 <한 창조과학자의 ‘회심’을 옹호하며> 라는 글들을 읽으며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 정말 ‘젊은 지구 이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인가?

젊은 지구 이론이라면 지구의 나이가 6천년 되었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6천년이라는 시간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및 그들이 살았던 나이를 종합해서 나온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조과학회라 는 곳이 그렇게 믿을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바였다. 그들이 창조론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부정직 공격하기, 성경 유적 찾기 등의 저급한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창조론이라는 것이 공백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취약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예수전도단에서 주최하는 수련회를 갔을 때, 이런 종류의 특강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내 스스로의 생각 역시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개인적으로 창조론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관련 내용들을 공부해 왔다.

내 가 너무나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정말 한국 기독교계에서 ‘젊은 지구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이라고 한다면, 이건 정말 우스운 일일 뿐더러 한국 기독교계의 사상적인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은 정말 그렇다는 것을 별로 믿고 싶지 않다.

두 번째로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 ‘과학자와 신학자가 겸손하게 서로의 말을 들어야 한다’ 정도의 말이 이 특집의 결론으로서 적절한 것일까?

지 면의 한계나 필진의 한계가 있을 것이니 최근에 유행하는 어떤 창조론에 대한 소개를 자세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창조론’이라는 것 자체가 기존의 과학계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이 아닌데다가 한국에서의 척박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현재 과학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적절한 기고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특집에서는 ‘창조론’과 관련된 논의의 틀이 거의 ‘미국’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 중에 잠시 언급된 바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분야에서 앞서가는 나라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신학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고 철학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런 특집을 다루면서 글을 쓰려고 했다면 분명히 유럽 쪽의 관련 논의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겸손하게 서로의 말을 경청하자’ 정도의 나이브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큰 임팩트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특집에서도 그렇지만, 창조론 논쟁이 어려운 이유는 사람들이 창조론과 진화론을 과학 이론이라는 동일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의와 추론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을 거부하는 이유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자연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창조론을 이야기함에 있어 이런 논의 수준의 뒤섞임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런 논쟁이 격렬해지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

그 러나,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뒤섞여 있는 논의의 수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분명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고 그것이 파생하는 효과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은 논쟁이 쓸데없이 소모되는 것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진화론’이라고 불리는 정교한 과학 이론에 비해 ‘창조론’이라고 하는 과학 이론이 갖는 미약함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쟁이 토마스 쿤이 이야기한 패러다임 전쟁이라고 한다면, 결국 현재 주류 과학에서 인정받고 있는 진화론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현상들을 그대로 잘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창조론이 과학 이론으로서 가지고 있는 위치라고 하는 것은 기껏 알려진 현상 어느 정도, 그리고 진화론이 설명할 수 없는 작은 몇 가지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그것도 공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수도 있는) 는 정도에 불과하고, 이런 사실은 대부분의 과학자들로부터는 냉소, 혹은 침묵을 유발하고, 신학자들로부터는 호전성을 유발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리잡은 나이든 교수’ 세대와 ‘불안정한 젊은 과학자’를 대비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더욱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시도 자체는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의미에 비해 실제 글들이 가지고 있는 깊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은 특집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더욱 깊이있는 논의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