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술

나는 술을 먹지 않는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개인의 기호를 중요시하기 시작했던 최초의 세대일지도 모르는 X-세대에 속해있는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술을 먹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지금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사람들이 왜 술을 먹지 않는지 잘 묻지도 않기는 하지만, 20대에는 그런 질문을 꽤나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신앙’, 그리고 ‘어머님이 싫어하셔서’ 라는 이유를 댔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술’의 상관 관계에 대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술은 피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술 마시는 일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술을 먹는 행위’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술 취하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술을 마신 행위’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술’이 과연 ‘술’일 뿐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한국 기독교가 술을 터부시하게 된 것은 한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 보니 한국 사람들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삶이 개선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고, 술을 적극적으로 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금주령이라는 것이 선포된 적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금주령이 1920년대에 종교적인 이유로 선포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는 이미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에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고, 19세기 초 혹은 20세기 초에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시기적으로 대체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삶이 어려울수록 술을 많이 먹게 된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20대에 청상 과부가 되어 혼자의 몸으로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내야 했던 내 외할머니가 술만 드시면 기분이 좋아지셨다는 말을 들어보면, 삶에 얼마나 낙이 없었으면 그러셨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에는 그런 외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고 하시지만, 그래서 남편이나 자식이 술을 마시는 것도 많이 싫어하시는 것이겠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본 술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도, 정도는 다를지 모르지만, 희망이 없는 힘든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위안으로서 술을 찾는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런 삶 속에 신앙이 들어가게 되면서 술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을 것이고.

이제 눈부시게 성장한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술을 먹는 가장 큰 이유가 ‘희망이 없는 삶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서’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능이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술을 먹지 않는 이유는 ‘술을 먹는 행위’가 ‘부패한 사회 구조’에 동참하는 일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패한 사회 구조란 ‘청탁’, ‘뒷거래’ 와 같은 말로 상징되는 무엇이다. 이른바 영업을 위해 술을 먹어주는 것, 중요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술을 먹는 것을 뜻한다. 나는 실제로 사람들이 술을 먹고 부패한 거래를 하는 이유는 맨 정신으로는 그런걸 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함께 (어느 정도의) 타락에 동참함으로서 서로에 대한 경계감을 누그러뜨리는 전략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술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정도의 작은 문제보다는 ‘술 권하는 사회’, 또는 ‘부패를 권장하는 사회’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끔 듣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김박사는 술을 안 먹어서 사장을 할 수가 없어!

내가 사장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거 말고도 훨씬 많이 있지만, 이 말이 현실적으로 들린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술로 대표되는 향락 문화 혹은 부패에 많이 물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속에서 ‘정의롭게’ 사는 것은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피하고 대적해야 하는 불의가 이거 말고도 얼마든지 많이 있고, 그 중 많은 부분은 내가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죄를 짓고 있다고 해서 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끔, 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크리스찬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개별적인 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장하고 심지어는 장려하는 죄의 구조라고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개인적인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적인 신앙의 부족으로 진단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현상을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시킨다는 면에서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기독교인과 술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고, 그래서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