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Life

2016년을 보내는 시간이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년이 지나가버린 느낌이다.

올해를 맞이하면서 했던 생각 중에 역시 중요한 생각은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자게 되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세울 수 있는 목표이기도 했고, 리디북스에서 구매한 페이퍼 라이트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목표이기도 했다.

올해 읽었던 책들은 (읽은 순서와 상관 없이) 플루언트 (조승연), 그릿 (안젤라 더크워스), 백설춘향전 (용현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곽재식), 엑시덴털 유니버스 (앨런 라이트먼), 앵무새 죽이기 & 파수꾼 (하퍼 리), 마션 (앤디 위어), 나의 한국 현대사 (유시민), 해방 후 3년 (조한성), 철로 된 강물처럼 (윌리엄 켄트 크루거), 조선의 정체성 (박석희, 최식원, 황금희), 본삼국지,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장자, 근원수필 (김용준), 살며 생각하며 (미우라 아야코), 아멜리 노통브 시리즈 8권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 왕자의 특권, 생명의 한 형태, 아담도 이브도 없는, 제비 일기, 적의 화장법, 앙테크리스타, 살인자의 건강법), 보르 코시건 시리즈 2권 (명예의 조각들, 바라야 내전), 깊은 강 (엔도 슈사쿠) 그리고 헬로월드 시리즈의 거의 모든 책 (약 90권) 정도 되는 듯 하다. 헬로월드 시리즈의 책들은 대체로 매우 짧고 한정된 주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숫자를 그대로 세기에는 좀 우스운 측면이 있지만 굳이 권수로 따지자면 약 100여권 정도이다.

올해 읽기를 시작했지만 포기한 책은 홍루몽과 대망이 있다. 둘 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긴 호흡의 소설이기는 한데, 그런 이유로 따라가기에는 호흡이 너무 길다는 느낌이 들어서 몇 권 읽다가 중단한 상태이다.

올해의 책 읽기를 분석해 보면, 서점에서 책을 살 때와는 달리 베스트셀러의 비중이 늘었고 기독교 관련 서적이 많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이북으로 나오는 책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또는 출판사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책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내게 충격을 준 책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고 해야겠다. 가장 최근에 읽은 조승연의 플루언트 같은 경우에는 내가 오랫동안 머리 속으로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내용들을 너무 비슷하게 다루고 있고 너무 잘 정리해 놓아서 약간은 놀랍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이북에 편중되다보니 주제가 한정된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내년에도 유사한 패턴으로 지속적으로 책읽기를 하려고 한다. 그것이 내 생활의 패턴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그리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생각에 스스로를 노출시킬 수 있도록 해야겠다.

Book, Life

리디북스에서 헬로월드 시리즈를 구매해서 읽고 있다. 일년에 5천원의 돈을 내고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아주 마음에 드는 기획 중의 하나다. 웬만하면 이 시리즈로 새롭게 나오는 책들을 다 읽고 있는데 며칠 전에는 <윤동주>와 <슈퍼히어로 전성시대>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슈퍼히어로 전성시대>의 내용에 실려 있는 마블 코믹스 같은 것은 내가 관심을 갖던 분야가 아니어서 그냥 심심하게 읽어내려갔지만, 이 책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슈퍼히어로들이 더 이상 선을 지키는 용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 결점과 단점을 지닌 개성있는 존재들로 그려지고 있다는 부분이다. 누구나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을 하곤 하지만, 사실 세상을 구한 영웅조차도 그냥 평범한 잘못과 실수를 저지르는 나같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게 70년대 슈퍼히어로와 지금 시대의 슈퍼히어로가 갖는 차이이다. 더 이상 천편일률적이고 전형적인 영웅과 악당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한 면에서는 영웅적이지만 나머지 많은 부분에서는 한없이 찌질한 사람들이 만화이건 영화이건 소설이건 주인공을 차지하고 있고 그것이 더욱 현실적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일제시대를 온 몸으로 살았던 윤동주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독립 운동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본 그였을테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과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면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창씨개명을 받아들이고 일본으로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가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삶의 모습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 사이의 커다란 간격은 그것을 정직하게 바라볼수록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내게 윤동주가 자신의 시 속에 표현했던 그 부끄러움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인 듯 하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전제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명확하다. 이 땅의 어두운 곳, 소외받은 곳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일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내 생각이 관념적인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차원으로 구체화될 수 있도록 해 주는 아름다운 거울이다. 문익환 목사, 장기려 박사, 김교신 선생, 문정현 신부, 그리고 이름 없이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나는 어떤 삶이 가치있는 삶인지 알면서도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하는 비겁한 면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을 이미 살아내고 있는 분들을 보면서 그들의 뒤를 따르기 보다는, 그분들에게조차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연약한 모습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위하는 비겁함은 그 생각이 사실이든 아니든간에 더욱더 비겁한 일이다. 이런 비겁함 때문에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움을 시로 승화시켜낸 윤동주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의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삶을 마감하고는 찬란한 별이 되었다. 그가 자신의 동기였던 문익환 목사만큼이나 오랜 삶을 살았다면, 그에게도 수많은 영욕의 굴레가 씌워졌겠지. 그리고 이런 생각이 한편으로는 나 자신을 위로하는 비겁한 변명이 되어 주었겠지… 윤동주의 시는 이런 내 마음을 너무나 부끄럽게 노래하고 있다.

Book, Life

2015년이 지나고 2016년을 맞이하게 된다. 많은 일이 있었던 지난해였지만, 무엇보다도 큰 일이라면 역시나 직장을 옮긴 일일 것이다. 작년 이맘때는 지금 다니는 직장에 다니게 될 것이라고는 정말 조금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이나믹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수록 더욱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은 비슷비슷하고 정말 새로운 것이란 잘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면서, 내가 하는 고민이 나만의 특별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고민임을 알게 되는 것만큼 경험할 때마다 새로운 일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경험해 봐야 하고, 그러기 위해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책이 사람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는 것이 고민하는 순간 답을 주는 것도 아니며, 모든 책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많이 읽는 것만큼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최소한 책을 읽으며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를 알아보는 훈련을 하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는 시간을 투자한 것에 대한 충분한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006년에 ‘1년에 50권 책 읽기‘라는 목표를 가지고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제 그 목표를 세웠던 해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지난해에는 특별한 목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70여권의 책을 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열심히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기에 정확하게 세어볼 수는 없었다. 올해에도 많은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리디북스에서 네 번에 걸친 이벤트에서 얻게된 책이 거의 1000권에 다다른다. 물론 읽어본 책도 많이 있지만 읽어보지 않은 책이 더 많은 것 같다. 기숙사에서 지내는 날이 꽤 될 예정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에 비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는 더 늘어났기 때문에 이 책들 중에 상당수를 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 본다.

중학교 시절에 세웠던 인생의 목표인 ‘교양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목표는 40이 넘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목표인 것 같다. 그래도 10대에 생각했던 내 삶과 지금 40대가 되어 생각하고 있는 내 삶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기도 하다. 강명식은 ‘그 때까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10년을 하루같이 황소 걸음으로 걸어간다면…’이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대략 30년 정도를 그렇게 걸어온 것 같다. 앞으로도 수십년을 그렇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걸어가다보면 ‘그곳, 그곳에 더 가까워 있겠지…’.

왠지 조금은 더 감상적이 되는 2016년의 둘째날 저녁이다.

Book

최근에는 주로 리디북스를 이용해서 책을 읽고 있다. 아이폰 5s와 아이패드 3를 쓸 때는 사실 전자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는데, 베가 시크릿노트와 HP 슬레이트 7 태블릿을 사용하게 되면서는 전자책을 읽는 빈도가 많이 늘어났다. 전자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실 책의 부피와 무게 문제도 있고, 독서를 하면서 줄을 치거나 메모하는 것을 싫어하는 습관 때문에라도 나는 전자책을 매우 좋아한다) LCD 화면으로 읽는 것은 눈이 좀 아프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달 전 쯤에는 리디북스 전용으로 쓸 생각으로 교보 Sam을 구매했고 편안하게 전자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꽤 만족하고 있다.

리디북스에서 꽤 많은 책을 구매했는데 최근에는 그 중에서도 How to read 시리즈의 책을 읽고 있다. 이 시리즈에 포함된 책은 마르크스, 니체, 데리다, 프로이트, 라캉, 히틀러, 다윈, 셰익스피어, 성경, 푸코, 융, 사드,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그리고 마키아벨리 등 모두 16권이다. 첫번째로 How to read 마르크스를 읽었고 다음으로는 How to read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은 How to read 다윈을 읽고 있는 중이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고. How to read 시리즈의 책은 몇몇 원문에 해설을 붙여놓은 식으로 되어 있는데, 마르크스라는 사람의 사상에 대해 그저 수박 겉핥기 식의 지식밖에 없었던 내게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았다. 사실 다 읽고 난 지금도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감은 전혀 잡을 수가 없다.

반면 성경의 경우는 정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평생 읽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생각해야 할 새로운 것이 발견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 ‘How to read 성경‘의 저자인 리처드 할로웨이 주교의 해석과 견해를 읽으면서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비교도 해 보고 내 나름대로 평가도 해 보면서 꽤 많은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독서였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 개신교식의 성경 이해에 좀더 익숙한 상황에서 유럽 가톨릭식의 성경 해석을 보면서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고.

평생 마르크스를 진지한 마음으로 읽어온 사람의 견해를 읽으면서 그걸 한번에 이해해 보자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얄팍한 생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저작을 제대로 읽고 다시 한 번 깊이있게 이해해 보자는 결심이 선 것은 아니다. 이 방대한 시리즈의 책들을 한 번씩은 읽어보고 나서야 다음 독서의 주제가 어떻게 될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깊이있는 인문학 개론서를 읽고 실제로 더 깊이있는 인문학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Book, Christianity

자끄 엘룰의 <잊혀진 소망>을 읽고 있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번째 부분은 “지금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은 “소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반응이다”라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진단이 충격적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수준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최소한 공동체 단위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 구약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최소한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 개인에게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동체가 그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말씀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 교회의 조직이 강화되는 것 등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들은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해석학이 발전하는 것도 결국은 ‘역동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진 텍스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해 보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없을 때, 즉 성령에 의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잃었을 때, 우리는 결국 성령의 조직하심을 대신할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외침들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필사적인 항의요 안타까운 절규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사사 시대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범죄’ – ‘회개’ – ‘회복’의 사이클이 나타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렇지’라고 생각을 해 오고 있었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이 말씀하시는 시간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율법’을 세웠을 때, 그 엄청난 세부 사항들과 금기들,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 나타날 것이라고 선포된 징벌들…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실제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일부러 그 율법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징벌(혹은 축복)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것들을 평생 거의 한 번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 자체가 어쩌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부터 신약의 세례 요한에 이르는 4백여년간의 침묵기를 생각해 본다. 그 시간 속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실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을까? 아니, 그들 중의 소수는 역동적이고 주권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할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을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엄숙주의이던지, 아니면 말씀 해석에 대한 열심이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었든지 간에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모든 반응들이 매우 당혹스럽고 치열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일상을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겠지.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맞추어져 있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 나라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과 얼마나 반대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그 분의 말씀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기도가 위선적으로 느껴질만큼 성령의 부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은 또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인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이 곳에 임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소망이 아닐까. 그래서 소망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조용히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성령 충만’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와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너무나 달라서 참을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이 정의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참을 수 없는 불일치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온전하게 체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뜨겁게 하나님께 항의하고 도전하는 공동체 속에 스스로를 헌신하지 않는 한, 이 깨달음만으로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욥에게서 느끼는, 그리고 전도서에서 느끼는 강한 허무주의의 느낌이 사실은 이 ‘성령 충만’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욥기를 읽으며 느꼈던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사실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욥이 하나님께 퍼부은 존재론적 질문에 답을 전혀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문 세례로 입을 다물게 된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들었다’는 사실, 하나님이 그에게 침묵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목이 터져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던 하나님이, 내용이야 어떻게 되었건 지금 이 시간 내게 무언가를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만큼 놀랍고 기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저 ‘스스로 드러내고자 하실 때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데 말이다.

Book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드디어 다 읽었다. 처음 이 책을 구매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부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역시 영어로 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집중력을 요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평소에 독서하는 속도로 한국어판을 읽었다면 이런 정도의 양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먹고 읽는다면 출퇴근길의 지하철에서 읽는 것만으로도 3일이면 충분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책을 천천히 읽다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새로 책을 펼 때마다 지난번까지 읽었던 부분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래서 한 번 책을 폈을 때 읽을 수 있는 분량이 줄어들게 된 것 같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인공이 자신과 관련된 기억은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이 책에서 읽은 것은 모두 기억할 수 있게 된 상황, 할아버지 때부터 모아온 장서들과 음반, 잡지 등의 매체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찾아나가고자 하는 여정, 그리고 다시 한 번 쓰러지게 되면서 지난 기억이 모두 살아나는 상황.

자신의 부하 직원과의 관계를 기억해낼 수 없어서 당혹해 하는 얌보의 모습. 기억이 없는 사랑이란 무엇일까? 기억이 전제되지 않는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일 아무런 기억이 없이 다시 만난다면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매일매일 떨리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느 순간 내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면, 내 아내를 다시 봤을 때 그녀를 이전처럼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내가 아무도 모르게 몰래 사랑했던 사람을 보면서 ‘내가 저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나? 저 사람과 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하고 자문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기억이 뒷받침되지 않는 사랑이란 뭔가 빠진 듯한, 아니 본질적인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움베르트 에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상상할수조차 없는 자전적인 소설이다보니, 그가 어려서부터 겪어온 모든 생활의 단면들, 그리고 그의 사상적인 기반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되는 동시에 어린 시절에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지난날의 추억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특히, 전쟁을 겪은, 그것도 파시즘의 준동을 경험한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국민으로서 그가 회상하는 지난날의 추억은 자못 흥미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위태위태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자신이 어려서 접했던 만화, 잡지, 라디오 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그런 부분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만큼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책, 만화, TV에서 봤던 것들… 등등을 떠올려볼 수 있었고, 사실 딱히 떠오르는게 많지는 않았다. 떠오른다고 해도 에코가 묘사한 이런 정도의 묘사는 절대 불가능할 것 같고 다만 어렴풋한 기억과 빛바랜 이미지 뿐이었다.

캐산, 철인 28호, 독수리 오형제, 우주소년 아톰, 그랜다이저, 이상한 나라의 폴, 요술공주 밍키, 모래요정 바람돌이, 84 태권브이, 그리고 무엇보다 은하철도 999! 에어울프와 제트카, 에이특공대, 말괄량이 삐삐, 600백만불의 사나이, 바야바, 그리고 무엇보다 브이! 고교야구의 인기와 프로야구의 시작, 땡전뉴스, 조용필과 전영록, 이용, 이은하, 혜은이.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과 추코프스키의 은빛 시절, 그리고 정비석의 삼국지. 선데이서울과 건강다이제스트.

중학교 시절의 애국조회. 교련복을 입은 연대장 (학생회장이 아닌). 무지막지한 구타. 한 반에 60명 한 학년 18반이었던 남자중학교. 전교조 사태와 학생들의 시위.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어주시던 미술 선생님. 광야에서와 아침이슬. 클래식 크롬 테이프와 황인용, 요요 카세트로 듣던 별이 빛나는 밤에.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학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주찬양 선교단, 그리고 첫 사랑…

2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벌써 20년?’하고 놀라게 되지만 소설 속의 얌보와 같이 60이 넘은 나이에 그 시절의 추억을 옛 자료로부터 찾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아마도 추억의 먹거리, 혹은 남이섬에 있는 추억의 박물관 같이 7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물건들을 보며 느끼는 어떤 느낌들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느낌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런 장소가 있어도 잘 들어가보지도 않지만 그런 문화들이 지금의 나를 형성해오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터이다.

얌보가 안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의 근원을 알 수 있는 어릴적 경험. 아무래도 내게는 생소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에게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것보다 훨씬 더 영화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대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을 터. 나라를 잃은 경험과 전쟁에 대한 경험은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거리일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사람의 삶을 얼마나 극적으로 그리고 크게 바꿔놓는지에 대해서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남자가 작가인 이상 여자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얌보의 기억에서 마지막까지 흐릿하게 남아있었던 것은 바로 첫사랑의 얼굴이었다. 첫사랑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걸까? 누구나 첫사랑의 아픔 혹은 사연을 가지고 있겠지만, 첫사랑의 상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내 경우에도 그랬지만, 첫사랑의 대상은 그야말로 그 때까지 자신이 만들어온 가장 이상적인 이성의 모습을 상상속에서 그리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본질을 알지 못하고 하는 사랑이란 항상 공허할 수 밖에 없고, 아름답게 기억될 수는 있을지언정 깊이있게 기억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상대를 상상 속의 존재로 만들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면, 아예 가질 수 없어서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빠르니까. 그래서 상대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 상대방이 나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존재에서 현실적인 존재로 바뀌게 되는 일은 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갈 수 없는 섬이 아름답고, 가질 수 없는 것이 가치있는 것이다.

첫사랑? 어디 그 뿐이겠는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욕망과 타협을 하는 순간 그것은 관념의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을. 그것은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답답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그런 정도의 욕망의 대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그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이 되겠는가!

책정보

[genie 0156030438]

Book

“니가 무슨 김삿갓이냐!” 라는 문장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결국은 이름은 그대로 번역을 하고 주석을 달아서 설명을 해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외국인 독자가 이 문장이 담고 있는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900페이지가 넘는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읽으면서 했던 생각이 바로 이런 생각이었다. 내가 영국이나 프랑스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세 유럽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만큼, 책을 읽으면서 번역자가 정성스럽게 달아준 주석들을 거의 빼놓지 않고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니 어떤 책을 읽을 때 보다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속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기 때문에, 이렇게 느려터진 속도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읽음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주는, 문장이 주는 의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역자주를 보고서야 이 문장이 풍자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라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놓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는 재미는 상당했다. 바로 이전에 읽었던 시라노에서도 그런 점을 느끼긴 했지만, 위고의 문장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없이 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비유의 향연이었기 때문에 그런 비유의 향연을 즐기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레 미제라블 같은 소설과는 다른 종류의 소설이기 때문에 스토리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관조적으로 스토리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웃는 남자인 그윈플레인의 삶은 그의 웃(을수 밖에 없)는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우울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의 이유였던 그윈플레인과 데아의 사랑은 처음부터 가장 대조적인 만남이었으며,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무한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사랑이었지만 이런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잠깐의 놀라운 비상조차도 그의 삶이 가진 슬픔을 보상할 수는 없을만큼 그렇게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것이 세상이라고 하는, 혹은 시대라고 하는 괴물과 맞서야 했던 모든 사람들의 숙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숙명에 적당히 순응하여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윈플레인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낸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이 뛰게 만드는, 그리고 감동적인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를 모두 경험해 본 그윈플레인이 잉글랜드의 귀족들에게 처절하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요구했던 그 연설이 귀족들에게는 하나의 너무나 웃긴 촌극에 지나지 않았음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당시의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대부분의 평민들에게도 그렇게 받아들여졌음이 분명하다고 볼 때,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니라 좁고 헙한 길, 그러나 가야 할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한 순간의 재미로 끝나는 책이 아니라,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분명히 좋은 책이다. 두 번 세 번 읽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최근에 만나기가 어려웠던 그런 종류의 책이다.

책 정보

[genie 8932907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