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tianity, Music

"찬송가는 예배에 적합한 음악인가?"라는 질문은 "한국 찬송가는 실패했다"는 한 목사님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감정의 흐름이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는 가사 때문에 젊은이들이 예배에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 그 중요한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주일오전 예배 시간에 찬송가를 모두 네 번 부른다. 아마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주일오전예배에도 찬송가를 부르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찬송가가 예배에 적합한지 또는 성공하고 있는가를 물어보기 이전에 예배는 무엇인가에 대한 간단한 전제를 깔고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예배는 ‘말씀을 낯설게 보기’를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선포될 때 본질적으로 낯설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상 가능한 어떤 것이 선포되는 상황은 그 메시지가 변형되었거나 최소한 힘을 잃은 상황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예배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 역시 말씀을 낯설게 보게 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예배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찬송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찬송가를 통해 어떤 신앙의 경험을 가진 경우가 많이 있다. 오랫동안 불러오면서 그 노래가 가진 힘, 노래가 주는 정서, 노래가 주는 느낌에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 때문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찬송가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러니까.

이 ‘익숙함’이라는 요소는 선포되는 말씀의 ‘낯설음’과 대비되면서 그것을 중화시켜주는 좋은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말씀조차 ‘익숙함’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많은 경우에는 후자와 같이 ‘익숙함’에 기대려는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따라서, 찬송가가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느낌으로 새롭게 재해석되어 곱씹어지지 않는 한 예배 시간에 사용되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감정의 흐름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모던 워십곡과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아니다. 찬송가와 모던 워십 곡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에 대한 판단은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찬송가를 새로운 느낌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주로 성가대나 찬양팀에 의해 이루어질 수 밖에 없고, 어떤 면에서 보면 단순한 네 단짜리 노래를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에 비해 더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다. 내가 찬송가 편곡 음반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물소리’ 찬양집에 보면 ‘함께 부를 노래가 있었으면 해요’라는 노래가 있다. 이게 바로 지금 시대의 음악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런 노래를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시편의 선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항상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노래 자체가 새 것이든, 노래를 대하는 태도가 새 것이든, 노래의 느낌이 새 것이든 상관없이 어쨌든 새 노래로 찬양을 해야 한다.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준다고 해도 그 노래가 어제의 은혜, 어제의 느낌, 어제의 감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면 정말 좋은 찬양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Christianity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너무 추상적인 질문인 것 같다. 2015년 6월 28일에 시청 앞 서울 광장에서 열릴 예정인 퀴어문화축제와 관련한 기독교인들의 여러 가지 반응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 질문의 의도가 좀더 명확해질 수 있겠다.

주변의 선량하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격렬한 증오의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면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부분에서 남을 비판하는 것을 자제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분들이 너무나 뚜렷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 생경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경험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세대 간의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동성애자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에서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내가 잘 아는 신실한 친구로부터 개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어떤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과 공유한 글들을 읽어보면서 이런 느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감히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관한 부분을 판단할 수 있는 깜냥을 가지고 있지 못한 나지만, 그 분의 순수한 신앙과 누군가를 향한 격렬한 증오가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런 생각 때문에 그 분의 순수한 신앙 자체에 대한 의심을 갖는 것도 바른 자세는 아니겠지만.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선언이라면 나는 예수님처럼 살겠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을 하나님 아들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그 분의 사랑에 있다고 믿는다. 물론 예수님이 전혀 분노하지 않았던 분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분 역시 자신의 분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셨던 분이다. 그러나 그 분노는 하나님을 세상에서의 이익과 맞바꾼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억압적 구조를 향하고 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내뿜는 증오는 결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방식으로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그러면 너는 동성애를 찬성하는 거야?"라는 조악하고 폭력적인 질문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증오하는 것이 없다고 말할만큼 용기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을 향해 맹목적인 증오의 말을 서슴없이 던질 수 있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무엇을 또는 누구를 사랑하거나 증오할 권리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것을 폭력적으로 표시하는 순간 그 사랑이나 증오는 죄가 될 수 있다. 그 사랑이나 증오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되고 조정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과의 관계를 힘들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Christianity

애정남이 인기다.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그만큼 우리 삶 속에는 애매한 것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일테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가끔은 예수님이 이런 애정남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볼 것이다.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이런 문제에 대한 시원한 공식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는 것 말이다.

기도하면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간증을 듣거나 하면 이런 답답함은 더욱 커지게 된다. 내게도 그런 일이 지금 한 번만 일어나 주면 앞으로는 매일 매일 기도만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시원한 답을 얻기는 커녕 뭔가 선택을 해 놓고 나서도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나고, 강단에서는 이런 일이 바로 지금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야만 하니 믿음을 가지라는 선포가 이어진다.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온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도하심의 사건의 빈도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사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보다 침묵하실 때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을 남긴 모든 선지자들은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사실 매순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신다는 체험담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점장이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점장이를 찾아가는 이유는 돈이 좀 들더라도 애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던가.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아직 점장이라는 직업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애매한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일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한다.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개입하시지는 않을거라고 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 아기처럼 대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었다면,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아담이 하와이 손에 들려있는 그 과일을 보는 순간, 다윗이 자신의 궁전에서 웬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음심을 품은 순간, 유다가 예수를 은 20에 넘겨주기로 약속하는 순간 그들에게 분명하게 NO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정남이 아니시다. 그분은 당신의 삶에 수시로 개입해서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대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당신의 슬픔, 좌절감, 분노, 절망 그 모든 아픔들을 묵묵히 함께 당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돈을 받고 어려운 결정을 대신 해 주고 책임은 지지 않는 점장이같은 분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당신을 위해 열정적으로 변호할 준비를 하고 있는 좋은 친구같은 분이다.

Christianity

첫번째 이야기

창조론과 진화론 – 어떤 짧은 논쟁 글에 대한 non_believe님의 댓글.

말을 잘못이해 하신것같은데 제 트윗의 취지는 우리가 실제로 확인할수 있는 중간종의 모습은 화석등의 자료를 토대로 연구하는것인데 실제로 화석은 사진찍는것처럼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흔한 창조론자들의 주장은 A와 B라는 종의 중간적인 화석C를 찾아냈다고 했을때 창조론자들은 그렇다면 A와 C는 중간이 어디있느냐 C와 B의 중간은 어디있느냐 식의 주장은 펴기 때문입니다. 이런식의 주장이라면 지겨울만큼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지 않는 태도의 창조론자들의 말장난을 받아줄 이유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말한 성장과 사진에 대한 트윗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

어느날 김태희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실 저는 신봉선이었어요!”

그녀는 그 말의 근거로 자신의 과거 사진을 공개했다. 그 사진에는 신봉선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무엇일까? 창조적인 생각에 약한 나로서는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전제 하에) 두 가지 정도의 가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1. 그녀는 성형 수술을 (한 번 혹은 여러번) 받았다.
  2. 그녀는 3천년 동안 매일 화장과 마사지로 얼굴을 관리해 왔다.

1번 의견은 ‘성형 수술’이 뭔지 모르는 옛날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이론이다. 2번 의견은 사람이 3천년 동안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 동안 기록(사진이나 그림 따위)이 잘 남아 있기만 하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의견 되겠다.

‘급격한 변화’를 인정하는 경우 중간종은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간종은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면 몸짱이 될 수 있으니 매일 화장과 마사지 등을 열심히 하면 신봉선이 김태희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정도 변화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만 있다면.

non_believe님의 예가 적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종 간의 변화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 혹은 신봉선이 김태희가 되는 것에 비해 훨씬 큰 변화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물들의 유전자 지도를 가지고 있는 지금도 새로운 생물 종의 창조라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을만큼 어려운 일임을 생각해 본다면,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유전자의 변화가 쌓여서 전혀 다른 생물 종이 생겼다고 믿는 것이 그렇게 합리적이지는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

창조론과 진화론 – 어떤 짧은 논쟁 글에 대한 qwmp님의 댓글.

일단 창조”론”이라고 진화론과 동등한 무엇으로 가정하는 것이 문제고, 종교적 억지가 아니라 정말 과학적 입장에서라면 논증을 통한 반박은 억지반례의 추구보다 추구하는 논리에 맞는 체계와 그 예를 제공하세요.

창조론과 진화론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데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추구하는 논리에 맞는 체계와 그 예를 제공해 보라는 말에 답변할 수 있는 역량은 내게도, 그리고 많은 (이른바) 창조과학자들에게도 없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논증을 통해 창조론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분들에 대한 동일한 수준에서의 반박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런 종류의 논증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생각을 합리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시도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사실은 모르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이다. 그 작업은 너무나 큰 일이어서 그것이 가능한지를 유추해 보는 것조차 너무나 큰 일이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기에는 좀 모호할 정도의 큰 사상적 배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혹은 과학적 허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논증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현재의 과학으로 chirality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까? 화학자에게 너무나 익숙한 개념인 chirality의 기원은 사실 어떤 방법으로도 그 기원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한 두 개의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제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테니.

이것으로 qwmp님의 질문에 대한 불완전한 (그리고 매우 모자란) 답변을 달아 보았다.

Christianity

개인적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논쟁이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 혹은 신념이란 어떤 것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논쟁은 과학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일 뿐이지만, 이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과학이 과학을 핍박하는 혹은 믿음이 이성을 지배하는 하나의 예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 전 트위터를 통해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화석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태도는 0이 커져서 1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 0.5가 있다고 얘기하면 0.5에서 1의 중간이 없다고 주장하고 0.75라고 얘기해 주면 또 그 사이의 중간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장난을 어디까지 맞춰줘야 하는가?

이렇게 답 멘션을 달았더니

@non_believe @qwmp 진화를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인 변화’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닐까요?

이런 답변이 다시 달렸다.

@lordmiss @qwmp 화석에 대한 반응이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이 자라서 현재 모습이 됐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중간중간의 사진만 있을 뿐 그 중간 단계는 자신이 증명할 수 없는데 과연 어떻게 어릴적 자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화로 종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긴 시간을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의 변화라는 큰 사건을 설명하는데 있어 눈에 보이는 진화는 너무나 작은 변화이기 때문에, 매우 긴 시간 동안 작은 변화들이 쌓여서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진화의 과정 중에 어떤 종류의 급격한 변화가 있어서, 짧은 시간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긴 시간이라는 전제는 필요없어진다. 급격한 변화를 인정한다면 중간종의 존재 역시 보여줄 필요가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종의 다양성이 작은 변화들이 무수히 반복되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중간종의 존재는 반드시 보여주어야 하는 일이 된다. 더군다나 현재 그 진화의 과정이 멈추었다고 볼 이유가 없다면 지금도 그런 변화들에 의해 종과 종 사이의 중간 상태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종과 종 사이의 중간종들은 생존에 적합한 형태가 아니므로 쉽게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종 간의 변화는 연속적인 변화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긴 시간이라는 전제도 필요없어질 뿐만 아니라 중간종의 존재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진화론자가 창조론자를 공박하기 위해 해야 할 말은 중간종 보여줬으면 되지 왜 또 보여달래? 가 아니라 중간종 안 보여줘도 아무 문제 없거든?이 되어야 한다. 창조론자들 역시 이 부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론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보기에는 큰 의미가 없는 공방일 뿐.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과학적인 사고, 혹은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산다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산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은 못 믿을 것 천지니까.

Christianity

크리스천투데이에 실린 한 편의 글.

CCM 앨범을 막 낸 사람은 신인이 아니고 프로여야 한다는 말로 기사가 시작된다. (찬양 사역자에 대한 조언으로서 이 글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말해두고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우선… 정확하게 용어를 정의하고 싶다. CCM은 Christian Contemporary Music의 줄임말이다. 컨템포러리라는 말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기독교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기독교인에 의한, 기독교인을 위한, 어느 쪽이든 의미가 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CCM으로 분류되어지는 음반을 출시한 사람이 반드시 ‘찬양사역자’여야 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찬양사역’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모든 기독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사역자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사역자로서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시야의 한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찬양사역자’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교회나 기독교 단체의 예배나 행사 때 찬양으로 섬기는 사람을 ‘찬양사역자’라고 부르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료로 봉사하는 것은 아니고 보통 사례비를 받게 된다. 나는 찬양사역자가 사례비를 받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프로 사역자라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합리적인 사례비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 찬양사역이라는 일이 결국은 대중가수들이 행사 뛰는 것과 비슷핟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음반 판매를 통해 많은 수익을 얻기 힘든 현 상황에 있어서 경제적인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좋은 음반을 내서 좋은 평가를 받는, 또는 인기가 있는 사람일수록 좋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그렇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면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찬양사역자들은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대중가수들조차 자신의 음악적 완성을 위해서 행사 뛰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음악이든간에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것은 존재 가치가 없다. 따라서 음악가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어줄 청중과 만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다. 음반을 내는 것, 공연을 하는 것, 행사에 출연하는 것 그 모든 일들이 청중과 만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청중과 직접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음악가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완성된 음악을 음반으로 내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좋은 CCM이란 좋은 음악이다. 그 안에 들어있는 메시지와 영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CCM을 만드는 사람 역시 음악가라는 말이다. 음악가는 자신이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음악계가 발전하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끊임없이 추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음반을 냈으면 프로답게 사역을 해야지’라는 점잖은 선의의 충고가 좋은 음악을 만드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주찬양 1집으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CCM 음악을 듣는다고 들어왔고, 최근에는 나 역시 이해하기 힘든 음반들을 많이 만났었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음악적인 색깔이 없이 ‘되는대로’ 만든 음반들을 들으면 사실 시간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좋은 기독교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어야 하고, 좋은 기독교 음악이 만들어질 수 있는 토양 역시 마련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역의 부담’을 덜 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CCM 음악이 성장할 수 있는 더 좋은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Book, Christianity

자끄 엘룰의 <잊혀진 소망>을 읽고 있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번째 부분은 “지금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은 “소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반응이다”라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진단이 충격적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수준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최소한 공동체 단위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 구약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최소한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 개인에게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동체가 그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말씀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 교회의 조직이 강화되는 것 등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들은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해석학이 발전하는 것도 결국은 ‘역동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진 텍스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해 보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없을 때, 즉 성령에 의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잃었을 때, 우리는 결국 성령의 조직하심을 대신할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외침들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필사적인 항의요 안타까운 절규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사사 시대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범죄’ – ‘회개’ – ‘회복’의 사이클이 나타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렇지’라고 생각을 해 오고 있었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이 말씀하시는 시간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율법’을 세웠을 때, 그 엄청난 세부 사항들과 금기들,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 나타날 것이라고 선포된 징벌들…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실제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일부러 그 율법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징벌(혹은 축복)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것들을 평생 거의 한 번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 자체가 어쩌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부터 신약의 세례 요한에 이르는 4백여년간의 침묵기를 생각해 본다. 그 시간 속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실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을까? 아니, 그들 중의 소수는 역동적이고 주권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할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을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엄숙주의이던지, 아니면 말씀 해석에 대한 열심이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었든지 간에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모든 반응들이 매우 당혹스럽고 치열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일상을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겠지.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맞추어져 있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 나라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과 얼마나 반대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그 분의 말씀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기도가 위선적으로 느껴질만큼 성령의 부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은 또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인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이 곳에 임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소망이 아닐까. 그래서 소망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조용히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성령 충만’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와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너무나 달라서 참을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이 정의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참을 수 없는 불일치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온전하게 체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뜨겁게 하나님께 항의하고 도전하는 공동체 속에 스스로를 헌신하지 않는 한, 이 깨달음만으로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욥에게서 느끼는, 그리고 전도서에서 느끼는 강한 허무주의의 느낌이 사실은 이 ‘성령 충만’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욥기를 읽으며 느꼈던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사실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욥이 하나님께 퍼부은 존재론적 질문에 답을 전혀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문 세례로 입을 다물게 된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들었다’는 사실, 하나님이 그에게 침묵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목이 터져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던 하나님이, 내용이야 어떻게 되었건 지금 이 시간 내게 무언가를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만큼 놀랍고 기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저 ‘스스로 드러내고자 하실 때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