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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애정남?

애정남이 인기다.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그만큼 우리 삶 속에는 애매한 것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일테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가끔은 예수님이 이런 애정남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볼 것이다.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이런 문제에 대한 시원한 공식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되는 것 말이다.

기도하면 구체적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간증을 듣거나 하면 이런 답답함은 더욱 커지게 된다. 내게도 그런 일이 지금 한 번만 일어나 주면 앞으로는 매일 매일 기도만 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시원한 답을 얻기는 커녕 뭔가 선택을 해 놓고 나서도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나고, 강단에서는 이런 일이 바로 지금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일어나야만 하니 믿음을 가지라는 선포가 이어진다. 그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온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시와 인도하심의 사건의 빈도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머리를 갸우뚱하게 된다. 사실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보다 침묵하실 때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을 남긴 모든 선지자들은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사실 매순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신다는 체험담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점장이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점장이를 찾아가는 이유는 돈이 좀 들더라도 애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서가 아니던가. 문명이 발달한 현대에도 아직 점장이라는 직업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애매한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일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한다. 그런 믿음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그런 방식으로 개입하시지는 않을거라고 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 아기처럼 대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었다면,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 아담이 하와이 손에 들려있는 그 과일을 보는 순간, 다윗이 자신의 궁전에서 웬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음심을 품은 순간, 유다가 예수를 은 20에 넘겨주기로 약속하는 순간 그들에게 분명하게 NO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애정남이 아니시다. 그분은 당신의 삶에 수시로 개입해서 시시콜콜 잔소리를 해대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하며 당신의 슬픔, 좌절감, 분노, 절망 그 모든 아픔들을 묵묵히 함께 당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돈을 받고 어려운 결정을 대신 해 주고 책임은 지지 않는 점장이같은 분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당신을 위해 열정적으로 변호할 준비를 하고 있는 좋은 친구같은 분이다.

자끄 엘룰의 ‘잊혀진 소망’을 읽으며

자끄 엘룰의 <잊혀진 소망>을 읽고 있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첫번째 부분은 “지금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명제를 설명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은 “소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반응이다”라는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대 사회에서 하나님은 침묵하고 있다는 진단이 충격적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수준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고 있지만, 최소한 공동체 단위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은 끊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 구약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최소한 구약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 개인에게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동체가 그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다’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말씀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 교회의 조직이 강화되는 것 등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들은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해석학이 발전하는 것도 결국은 ‘역동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진 텍스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해 보고자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없을 때, 즉 성령에 의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을 잃었을 때, 우리는 결국 성령의 조직하심을 대신할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외침들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필사적인 항의요 안타까운 절규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사사 시대는 물론이고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서도 동일하게 ‘범죄’ – ‘회개’ – ‘회복’의 사이클이 나타나는 것을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렇지’라고 생각을 해 오고 있었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이 말씀하시는 시간보다 훨씬 길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율법’을 세웠을 때, 그 엄청난 세부 사항들과 금기들, 그리고 그것을 어겼을 때 나타날 것이라고 선포된 징벌들…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실제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율법을 지키지 않은 죄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일부러 그 율법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징벌(혹은 축복)이 곧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것들을 평생 거의 한 번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것 자체가 어쩌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부터 신약의 세례 요한에 이르는 4백여년간의 침묵기를 생각해 본다. 그 시간 속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실망하고 좌절할 수 밖에 없었을까? 아니, 그들 중의 소수는 역동적이고 주권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대신할 무언가를 열심히 찾았을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엄숙주의이던지, 아니면 말씀 해석에 대한 열심이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었든지 간에 모습은 다를 수 있지만, 모든 반응들이 매우 당혹스럽고 치열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일상을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겠지.

예수님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맞추어져 있었음을 알고 있으면서, 그 나라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과 얼마나 반대인지를 절실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얼마나 가혹한 것인가. 그 분의 말씀이 강력하게 임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구하는 기도가 위선적으로 느껴질만큼 성령의 부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은 또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인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이 곳에 임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소망이 아닐까. 그래서 소망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조용히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성령 충만’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이 ‘성령 충만’이라는 말을 ‘와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너무나 달라서 참을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이 정의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참을 수 없는 불일치 속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온전하게 체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뜨겁게 하나님께 항의하고 도전하는 공동체 속에 스스로를 헌신하지 않는 한, 이 깨달음만으로 ‘성령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욥에게서 느끼는, 그리고 전도서에서 느끼는 강한 허무주의의 느낌이 사실은 이 ‘성령 충만’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욥기를 읽으며 느꼈던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사실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욥이 하나님께 퍼부은 존재론적 질문에 답을 전혀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질문 세례로 입을 다물게 된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들었다’는 사실, 하나님이 그에게 침묵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목이 터져라 불러도 대답하지 않으시던 하나님이, 내용이야 어떻게 되었건 지금 이 시간 내게 무언가를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만큼 놀랍고 기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저 ‘스스로 드러내고자 하실 때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인데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경제관 – 나의 경우

2010년 1월 12일 오전 트위터에서…

Namturtle98 기독교적 경제관은 뭘까. 바울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부를 가지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본주의 사회. 곧 돈이 최고인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lordmiss @Namturtle98 돈을 사랑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성경에 있나요? 별로 고민하실 일이 아닌 듯… ^^ Namturtle98 @lordmiss 그렇군요. 하나님만 따라가다 보면 부는 따라오는 것이겠죠. 단순하게 생각해야겠네요. 반대로 부를 쫓아가는 삶은 결국 디모데 전서의 말씀대로 온갖 악의 뿌리가 되겠죠. lordmiss @Namturtle98 하나님을 따르는 것과 부가 따라오는 것사이에는 별 연관성이 없어요. 아주 단순하죠. Namturtle98 @lordmiss 그렇군요. 부자든 가난하든 복음안에선 크게 중요하지 않죠. 바울의 고백대로.   하지만 부자가 되고픈 저의 욕망.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안타깝고 해서 적은 글이랍니다. Namturtle98 @lordmiss 사실 성경대로의 가치관과 일에 대한 철학. 하나님의 소명 같은 의식이 충분히 뿌리내려 있다면 부자가 안되는게 이상하지 않나 요즘 생각해 봅니다. 혹 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lordmiss @Namturtle98 부자 되지 마세요. 천국 가기 무지 힘들어요. 진짜루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Namturtle98 @lordmiss ㅎㅎ 네. 맞죠. 그런데 전 구원받았고 천국이 제 집이니깐 돈많이 벌어서 교회도 세우고 선교사도 돕고 해야겠죠. ㅎ Namturtle98 @lordmiss 로드미스님이 담에 블로그에 성공적인 경제관에 대해 깊이있는 글 한번 적어주세요. 제게 적었다고 맨션 함 날려주시구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 글을 적게 된 배경은 위와 같다.

아래에 적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경제관과 관련된 이야기. 별 논리는 없이 적어내려간 내용이다.

1. 성경의 부자 성경에 많은 부자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가난한 사람들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간에, 성경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재물 소유 여부가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사실.

2. 예수님의 경제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재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까지 자신과 같은 생활을 요구하셨다.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있어 ‘돈을 의지하는 마음’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 아닐까.

3. 바울의 경제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바울의 경제관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4. 청부론 얼마전 청부론 논란이 있었다. 하나님의 원칙을 잘 지키면서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이 골자였다고 생각된다. 이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부지런함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라면 훌륭한 개인 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돈을 버는데 있어서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과 부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의미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인 윤리 중에서 부를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검소함과 소명의식 정도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하던지 아니면 사회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돈이 돈을 버는 사회’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부자가 된 케이스를 예로 드는 것은 복권 당첨으로 돈을 번 케이스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검소함과 소명의식이 중요한 개인 윤리이기는 하나, 그 윤리는 부자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지금까지 사람 사는 사회가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런 사회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냉혹한 세상의 논리만 살아남는 곳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권세를 마귀가 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5.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도 짓고 선교사도 후원하면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실까?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짓는 것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큰 교회에 대한 질책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위해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은 발견할 수 없다. 그 분이 인간이 만든 성전 가운데 제한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은 눈에 보이는 멋진 것에 잘 현혹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따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며,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바로 재물이다. 하나님은 결코 재물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드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냥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말했다. 구원받았으니 돈 좀 벌어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선교도 도와야지…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교회건 선교이건간에 돈으로 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이며, 선교에 필요한 것 역시 돈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다. 돈 벌어서 교회에 내 놓고 자기 중심적인 삶에 대한 마음의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그냥 자신의 삶 전체를 내 놓아야 한다. 성경에서 돈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된 사건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 보시라.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도대체 하나님이 왜 자신의 알량한 (그것이 수천억이든 수십조이든간에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재산을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6. 결론 최대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를 해 본다. (사실 사회적인 부분, 공동체성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안타깝지만 내게 아직 그만한 내공이 없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것도 제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재능들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좋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 하고, 어떤 사람은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부른다. 이런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달란트’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물도 그와 같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하나이고,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된다. 어떤 기독교인도 ‘하나님 뜻대로만 살면 키가 커질 수 있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뜻대로만 살면 부자가 될 수 있어’라고 (진심으로) 말한다. ‘재물이 많다’와 ‘키가 크다’, 또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정확하게 같은 레벨에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돈을 버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7. 추가 Namturtle98님의 ‘전 구원받았고, 천국이 제 집이니까…’ 라는 말 속에서 구원관과 관련된 말을 추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구원은 일회적인 사건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강조한다. 바울은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조언한다. 일단 구원은 받았으니, 이제 돈 좀 벌어봤으면 좋겠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구원을 값싼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내 삶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더욱 많이 닮아가야 하는 사명이 있을 뿐, 돈을 벌거나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일 따위의 사명은 없는거다.

사랑의교회 재건축 논쟁과 관련된 생각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랑의 교회 재건축 관련 논란을 보면서 중요한 것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초대교회를 봐도 ‘교회의 일원’이 반드시 ‘구원받은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그리고 (아마도 많았을) 배교자들) 더 어려운 것은 ‘공동체’라는 단어에 있는데, 이 공동체라는 것이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정도의 수준까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교회 공동체는 아마도 가족 공동체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갖는 것임에 틀림없다. ‘핏줄’이라는 요소에 의해 지배받는 가족 공동체와 달리 이 공동체는 ‘믿음’이라는 요소로 지배받기 때문에 새로운 구성원의 추가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어느 교회를 가 봐도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구원의 확신’ 보다는 ‘꾸준한 출석’이 더 중요하다. 사실, ‘구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개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실제로 이 부분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가족 공동체’ 수준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일 때, 그리고 그 모임이 진정한 ‘공동체’일 때,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교회 구성원들의 신앙 상태를 확인하고 점검할 수 없고 공동체 의식의 순수성 역시 검증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 이 순간이 언제인지 수치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가 회사 고유의 문화를 지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도 그 교회 특유의 공동체성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교회가 자신의 공동체성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까지 스스로 분열하는 것 뿐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 분열이 실제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든, 아니면 구역, 가정교회, 지교회 등의 세부적인 조직을 의미하던간에 상관없이. 즉, 본질적으로 교회는 분열하게 되어 있다.

분열하지 않고 크기를 키워가는 교회는,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른 수단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즉, 스스로의 공동체성의 필수 요소들을 조금 포기함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던지, 혹은 공동체성의 유지를 위해 신앙의 요소가 아닌 다른 요소를 도입하던지.

많은 경우, 한국 교회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담임목사님에 대한 애정 (혹은 충성심)이다. 그리고, 신앙의 본질과는 크게 연관이 없어보이는 어떤 지엽적인 요소를 강조함으로서 여타 교회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전략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예를 들어 ‘새벽기도가 뜨거운’ 교회, ‘제자 훈련이 우수한’ 교회, ‘선교에 매진하는’ 교회 와 같은 캐치프레이즈들이다.

어느 것도 그 자체만으로 비판을 받을만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교회의 크기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네 개의 복음서가 서로 다른 신앙공동체에 전승되던 믿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믿음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 전승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고대와 같이 공동체들이 단절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현대의 상황에서 공동체들간에 네 복음서 공동체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거리일 수는 없다는 생각만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결국, 보편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부각시키려는 교회의 욕구, 그리고 차이가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른 말로 카톨릭을 추구하는) 교회의 조바심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수만명이 예배드릴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수천억의 돈을 들여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는 사랑의교회와 관련해서, 그 돈을 어디다 쓰는 것이 좋겠다라던가, 헌금 강요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수만명의 성도들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인가를 묻고 싶다.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힘이 과연 같은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적 신앙인지 아닌지를 묻고 싶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만명의 성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공동체적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조차 궁금증을 갖고 있는 내게는 그 대답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독교인과 폭력

성폭력에 대한 팟캐스트를 들었다. 꼭 이 내용 때문은 아니지만,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폭력에 대한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성폭력이 큰 문제가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보다는 폭력에 좀더 초점을 맞추어야만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적 의미의 폭력이라는 것은 강자가 약자를, 그리고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다루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있는 글을 쓸만큼의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고, 다만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펴봄으로서 폭력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에 대한 성찰을 해 보고자 한다.

성경(혹은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책들)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언뜻 보기에) 상호 모순적인 내용이 많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지엽적인 해석보다는 전반적인 기본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선, 구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율법에 나타난 특징들을 볼 필요가 있겠다. 출애굽기 22장 21~13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이 글에서 이방 나그네, 과부, 고아는 모두 사회적 약자를 표현하고 있는 말로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공동체의 임무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으며, 신명기 14장, 16장, 24장, 27장 등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이 때 이 선언들의 이유로 너희도 이집트에서 나그네였다라는 말이 제시되고 있다. 즉, 누구나 약자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은 그들에게 있어 전 공동체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는 기억이었으며, 그 기억을 되살림으로서 자신의 공동체 안에 그런 억압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타락을 경고했던 선지자들에게서도 이러한 의식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선포했던 이사야는 이런 점을 너무나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6-17)

예레미야 22장 3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그리고 말라기 3장 5절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에 이르기까지 이런 논리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는 일,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일, 사람을 학대하는 일, 노동자의 임금을 속이거나 억울하게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분명하게 심판하시는 범죄 행위이다. 이런 행위들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히 읽을 수 있다. 그는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의 친구를 자처했으며,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변호하였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정황상 그가 고친 많은 병자들은 사회적으로 억압받거나 배척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전혀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던 어린이들을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예수님의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낸 이야기는 바로 선한 사마리안인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인은 유태인들에게는 상종할 수 없는 더러운 족속으로 대우받던 사람들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레위인, 제사장 등과 비교한 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으며, 좋은 이웃에 대한 통념을 가장 극적으로 깨버린 이야기였다. 지금 시대의 언어로 이야기한다면, 보수 기독교인들이 가장 터부시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를 동일한 위치에 넣는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목사보다 동성애자가 더 좋은 이웃이다라는 선언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하나님은 약자를 편애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며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다수결의 원칙 조차도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는 합법적인 도구로 사용될 때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다면 분명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의 편이 되실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보면, 보수 기독교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로, 힘의 논리가 더욱 횡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것이 소수를 억누를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힘의 논리가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자라난 청소년들이 강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힘의 논리가 통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 특히 그 속에서 약자의 친구가 아닌 강자의 친구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라는 준엄한 심판의 소리를 피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수많은 폭력 앞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니 가해자의 편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언제 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피눈물을 흘리게 될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정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