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술

나는 술을 먹지 않는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개인의 기호를 중요시하기 시작했던 최초의 세대일지도 모르는 X-세대에 속해있는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술을 먹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지금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 사람들이 왜 술을 먹지 않는지 잘 묻지도 않기는 하지만, 20대에는 그런 질문을 꽤나 많이 받았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신앙’, 그리고 ‘어머님이 싫어하셔서’ 라는 이유를 댔었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술’의 상관 관계에 대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술은 피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최근에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술 마시는 일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술을 먹는 행위’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술 취하는 것’을 피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술을 마신 행위’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술’이 과연 ‘술’일 뿐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을 해 보고 싶다.

한국 기독교가 술을 터부시하게 된 것은 한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 보니 한국 사람들이 술을 너무 좋아해서 삶이 개선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고, 술을 적극적으로 금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금주령이라는 것이 선포된 적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그럴 듯한 이야기이다. 미국의 금주령이 1920년대에 종교적인 이유로 선포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는 이미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에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고, 19세기 초 혹은 20세기 초에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시기적으로 대체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삶이 어려울수록 술을 많이 먹게 된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다. 20대에 청상 과부가 되어 혼자의 몸으로 힘들게 자식들을 키워내야 했던 내 외할머니가 술만 드시면 기분이 좋아지셨다는 말을 들어보면, 삶에 얼마나 낙이 없었으면 그러셨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에는 그런 외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고 하시지만, 그래서 남편이나 자식이 술을 마시는 것도 많이 싫어하시는 것이겠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본 술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도, 정도는 다를지 모르지만, 희망이 없는 힘든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위안으로서 술을 찾는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런 삶 속에 신앙이 들어가게 되면서 술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을 것이고.

이제 눈부시게 성장한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술을 먹는 가장 큰 이유가 ‘희망이 없는 삶을 잠시나마 잊고 싶어서’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술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기능이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술을 먹지 않는 이유는 ‘술을 먹는 행위’가 ‘부패한 사회 구조’에 동참하는 일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패한 사회 구조란 ‘청탁’, ‘뒷거래’ 와 같은 말로 상징되는 무엇이다. 이른바 영업을 위해 술을 먹어주는 것, 중요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 술을 먹는 것을 뜻한다. 나는 실제로 사람들이 술을 먹고 부패한 거래를 하는 이유는 맨 정신으로는 그런걸 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함께 (어느 정도의) 타락에 동참함으로서 서로에 대한 경계감을 누그러뜨리는 전략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술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정도의 작은 문제보다는 ‘술 권하는 사회’, 또는 ‘부패를 권장하는 사회’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가끔 듣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김박사는 술을 안 먹어서 사장을 할 수가 없어!

내가 사장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이거 말고도 훨씬 많이 있지만, 이 말이 현실적으로 들린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술로 대표되는 향락 문화 혹은 부패에 많이 물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속에서 ‘정의롭게’ 사는 것은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피하고 대적해야 하는 불의가 이거 말고도 얼마든지 많이 있고, 그 중 많은 부분은 내가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죄를 짓고 있다고 해서 이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끔, 술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크리스찬 후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개별적인 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장하고 심지어는 장려하는 죄의 구조라고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개인적인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적인 신앙의 부족으로 진단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현상을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시킨다는 면에서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기독교인과 술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이고, 그래서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성경 번역본 저작권에 대한 생각

성경 번역본에 대한 저작권 설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뭐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대한성서공회의 홈페이지에서 저작권 관련 FAQ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Q.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저작권 허가를 받아야 하나요?

A. 대한성서공회는 개신교의 주요교단으로 조직된 연합기관입니다. 재단법인 대한성서공회의 재산은 한국교회의 재산입니다. 그러므로 저작권 보호는 한국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저작권 허가를 받아야 하냐는 질문에 대해 한국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답변을 내놓고 있다. ‘대한성서공회의 재산’ = ‘한국교회의 재산’ 이라는 등식은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겠지만) 받아들인다고 치고, ‘한국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돈이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성경 번역본 저작권 행사를 통해 돈 버는 것을 뭐라고 하면 안된다는 뜻일까?

물론, 많은 영어 번역본 역시 저작권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King James Version이나 American Standard Version 정도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고, New International Version이나 The Message 같은 번역본들은 저작권을 얻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와 관계 없이 성경 번역에 대한 저작권 행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온라인 성경의 경우 한 역본당 300만원/2년이라는 가격을 제시해 놓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라면 직접 연락을 해서 가격을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회사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 아닌 이상 개인이 직접 대한성서공회와 이런 부분에 대해 협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성경의 본문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제약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위키피디아의 성경 번역 관련 페이지에서는 개역개정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각종 교단에서 인준했으나 어색하다는 이유로 널리 쓰이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개역한글판 성경의 저작권 만료 기간이 도래함에 따라 2007년부터 점차 보급이 확대되고 있다.

개역개정판을 쓰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개역한글판의 저작권 만료라는 것이다. 이 언급의 진위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다른 근거가 없는만큼 이 말만 놓고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개역한글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개역개정판을 새롭게 쓰게 되면서 생겨난 어마어마한 시장 규모를 놓고 생각을 해 보면 그럴 듯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성경을 많이, 그리고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마다 CrossWire의 프로그램들을 깔아놓고 쓰고 있다. 윈도우, 맥, 리눅스, 그리고 (아이폰을 제외한) 많은 hand-held device들에서 이 프로그램들을 무료로 쓸 수 있으며, 이 프로그램에서 읽을 수 있는 모듈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아주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KDE에서 사용되는 프로그램인 BibleTime이라는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는 내가 번역을 했었다. 지금은 KDE를 쓰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있는데, 1.x 버전에서는 아쉬운대로 한글을 볼 수 있기는 하다) 아쉬운 것은 한글의 경우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추세인 개역한글판만이 사용 가능한 상태였으며, 현재는 그나마도 이용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sword 모듈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내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컴퓨터들에 개역한글판이 깔려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용자들의 경우에는 sword 관련 프로그램으로는 한글 번역본을 읽을 수 없는 셈이다. 이미 여러 기관의 홈페이지에서 여러 번역본이 제공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성경 프로그램, 예컨대 MyBible과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되는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MyBible은 매우 훌륭한 프로그램이고 개역한글판 외에도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개정판, 현대어 성경, 그리고 쉬운 성경 등 모두 여섯 개의 한글 역본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윈도우가 설치된 컴퓨터에서 설치를 통해서 사용할 수 있을 뿐이고 맥이나 리눅스가 깔린 컴퓨터나 핸드폰, PDA 등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는 방법이다. 번역본의 저작권 행사를 포기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장경동 목사님 비판에 대한 비판

최근에 대한민국에서는 ‘이명박-보수-기독교’의 연결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었다. 이명박-보수 라인은 정치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용인하기 어렵지 않은데, 보수-기독교 연결은 스스로를 (보수는 분명히 아닌) 어설픈 진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오늘 본 뉴스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내 관심을 끌만했다.

장경동 목사님은 대전 중문교회의 담임목사님인데, 일반 공중파 방송에 여러 번 얼굴을 내밀면서 특유의 구수한 입담으로 나름대로의 인지도를 확보한 목사님이다. 미국을 닮아서인지 신학적인 깊이가 얕기 그지없는 한국 교회의 기준으로 보면 꽤 성공한 목사님이지만, 사실 신학적으로는 (열심히 듣고 분석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장 목사님은 여러 사람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일부 기독교계 지도자들에 비해서는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동일한 연합뉴스 소스를 기반으로 한 두 기사 제목만 보고도 나는 이 기사들이 어떤 목적으로 쓰여졌으며, 어떤 반응을 불러오게 될지에 대해서도 쉽게 예측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살펴 봤을 때, 내 예상과 한치의 다름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사의 내용에 따르면 장경동 목사님은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린 전도집회에서 “내가 경동교(장경동교)를 만들면 안되듯이 석가모니도 불교를 만들면 안되는 것이었다”, “스님들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예수를 믿어야 한다.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 “불교를 비하한다고 하는데 나는 바른 말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위에 걸린 기사에 달려있는 댓글들을 보면, 주로 ‘역시 너도 똑같은 놈이구나’ 정도의 감정적인 비난 일색이다.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기독교에까지 투영되어, 아니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이명박 대통령으로 인해 강화되어,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가 나오면 자동적으로 이런 반응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반응에 대해 ‘이성적인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성이 없는 일인지는 그동안의 여러 사례들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 댓글 논쟁 속에 뛰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추가… MP4/13님의 댓글을 보고 추가합니다.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산다"는 말은 역사적 이해의 부족에서 온 사려깊지 못한 발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글을 쓴 저뿐 아니라 발언의 주인공인 장 목사님도 비판받을만 하다고 생각하며, 기독교인들이 좀더 깊이있는 역사 의식과 신학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제가 이전에 썼던 김홍도 목사님 설교에 대한 비판글, Again 1907? 이라는 제목의 글 등에 제 생각이 어느 정도 나타나 있으니 참고해 주십시오.)

그렇지만 나는 먼저 이 발언의 대상이 일반인이 아닌 교인들이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 발언을 누가 불교 조계종 총무원에 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말은 대상과 시기, 환경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발췌해서 폄하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스님들도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째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 어떤 억압적인 요소가 있는 것인지, 이 발언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스님들은 그냥 불교 믿어야 한다”라고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인지… 동일한 논리로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통해 기독교의 근간을 비판한 도킨스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사상을 위해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지 않고 싸잡아 매도한 나쁜놈이라고 비판한다면 어떻게 대꾸할 수 있을까?

전도집회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특수한 발언을 이렇게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가슴아픈 일일뿐만 아니라, ‘그럼 그렇지. 너도 똑같은 놈이야’라고 마음대로 써갈길 수 있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많은 부분에서 나와 동일한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때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이 발언에 대해 “가슴이 아프다”라고 이야기했다는 유인촌 장관의 반응이다. (무려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반응을 내놓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자신의 세상이 되었으니, 누구의 어떤 발언이건간에 자신이 감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이 사건이 보수-기독교 연합을 향한 중대한 도전이 될거라고 생각했던걸까? 그렇다면 그의 사고 수준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전부터 심히 의심스럽기는 했다)

가능하면 논쟁적인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 기사는 너무나 수준 이하인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 하여 한 마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뭔가를 써 보려고 했지만, 워낙 논리적이지 않은 대상을 비판하다보니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쓰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대충 마무리한다.

4월호 특집 이야기

내가 이른바 ‘복음주의 진영’이라는 곳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덕분인걸까? 복음과 상황4월호 특집으로 들고 나온 <한 창조과학자의 ‘회심’을 옹호하며> 라는 글들을 읽으며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 정말 ‘젊은 지구 이론‘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인가?

젊은 지구 이론이라면 지구의 나이가 6천년 되었다고 믿는 것을 의미한다. 6천년이라는 시간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및 그들이 살았던 나이를 종합해서 나온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창조과학회라 는 곳이 그렇게 믿을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바였다. 그들이 창조론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부정직 공격하기, 성경 유적 찾기 등의 저급한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창조론이라는 것이 공백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취약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데리고 예수전도단에서 주최하는 수련회를 갔을 때, 이런 종류의 특강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내 스스로의 생각 역시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을 때였는데도 불구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후로 개인적으로 창조론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조금씩이지만 계속해서 관련 내용들을 공부해 왔다.

내 가 너무나 당연히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인지 몰라도, 정말 한국 기독교계에서 ‘젊은 지구 이론’이 지배적인 이론이라고 한다면, 이건 정말 우스운 일일 뿐더러 한국 기독교계의 사상적인 수준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은 정말 그렇다는 것을 별로 믿고 싶지 않다.

두 번째로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 ‘과학자와 신학자가 겸손하게 서로의 말을 들어야 한다’ 정도의 말이 이 특집의 결론으로서 적절한 것일까?

지 면의 한계나 필진의 한계가 있을 것이니 최근에 유행하는 어떤 창조론에 대한 소개를 자세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창조론’이라는 것 자체가 기존의 과학계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상황이 아닌데다가 한국에서의 척박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현재 과학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적절한 기고를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특집에서는 ‘창조론’과 관련된 논의의 틀이 거의 ‘미국’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 중에 잠시 언급된 바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분야에서 앞서가는 나라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신학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고 철학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런 특집을 다루면서 글을 쓰려고 했다면 분명히 유럽 쪽의 관련 논의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겸손하게 서로의 말을 경청하자’ 정도의 나이브한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큰 임팩트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특집에서도 그렇지만, 창조론 논쟁이 어려운 이유는 사람들이 창조론과 진화론을 과학 이론이라는 동일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의와 추론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진화론을 거부하는 이유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자연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창조론을 이야기함에 있어 이런 논의 수준의 뒤섞임이 없을 수는 없다. 이런 논쟁이 격렬해지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니까.

그 러나, 문제를 좀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뒤섞여 있는 논의의 수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분명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고 그것이 파생하는 효과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구분지어 생각하는 것은 논쟁이 쓸데없이 소모되는 것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진화론’이라고 불리는 정교한 과학 이론에 비해 ‘창조론’이라고 하는 과학 이론이 갖는 미약함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쟁이 토마스 쿤이 이야기한 패러다임 전쟁이라고 한다면, 결국 현재 주류 과학에서 인정받고 있는 진화론을 대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현상들을 그대로 잘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창조론이 과학 이론으로서 가지고 있는 위치라고 하는 것은 기껏 알려진 현상 어느 정도, 그리고 진화론이 설명할 수 없는 작은 몇 가지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그것도 공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수도 있는) 는 정도에 불과하고, 이런 사실은 대부분의 과학자들로부터는 냉소, 혹은 침묵을 유발하고, 신학자들로부터는 호전성을 유발하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리잡은 나이든 교수’ 세대와 ‘불안정한 젊은 과학자’를 대비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더욱더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시도 자체는 매우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의미에 비해 실제 글들이 가지고 있는 깊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많은 특집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더욱 깊이있는 논의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예비군 훈련

4일간의 예비군 훈련. 일년에 서른 여섯시간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하니 이번 4일동안 서른 시간을 받았다고 해도 앞으로 여섯 시간이 더 남은 셈이다.

어제는 태풍 속의 고요였는지 날씨가 너무나 좋아서 해야 할 훈련을 다 했다. 훈련 하는거야 별거 아니지만 쓸데없이 땡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집에 와 보니 오른쪽 목덜미만 빨갛게 익어 있었다.

오늘은 오전부터 비가 많이 와서 실내에서만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육이라고 하지만,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다지 의욕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일이다. 그저 어떻게든 시간이나 빨리 가면 그만일 뿐. 나도 나름대로는 좀 들어볼 생각이 없었던건 아닌데, 들어봐야 뭐 별로 도움이 될만한 것도 없는터라…

어쨌든 4일동안 머리를 깨끗하게 비울 수 있는 기회인 것 같기는 하다.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 4일 지난다고 해서 말끔하게 해결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이것저것 과부하 걸려 있던 머리를 잠시 비워낸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도움이 될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내가 깊이있게 생각을 해 보지는 않았었는데, 오늘은 기독교와 군대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독교 정신과 군대는 어울리지 않는다. 기독교가 군대라고 하는 조직과 너무나 잘 어울려 있다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어색하게 느껴진다. 언제 한 번 군대에 대한 기독교적 생각에 대해 정리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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