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사태와 폭력

이번 아프간 피랍 사태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관대한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절대적인 고찰

누구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종교 없음 역시 매우 배타적인 종교의 하나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믿음을 기반에 두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믿음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개체적인 믿음의 다름도 중요하지만 그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정경, 신앙적 전통, 사제 등은 이런 일반화의 가장 중요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소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일반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 같은 경우에 같은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정도의 차이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견 교환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것 뿐이다.

선교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모든 종교에게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선교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아 그 배경에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역시나 선교라는 부분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믿음의 충돌, 그리고 이를 조정하기 위한 합의는 모든 개인간, 모든 (개인들로 이루어진 모든 수준의) 단체 간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아프간 사태의 핵심에는 이런 가치관의 충돌이 자리잡고 있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합의 과정에 폭력의 요소가 개입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폭력에 대한 생각 역시 사람에 따라 용인하는 범위가 달라질 것이다. 모든 폭력이 나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는 더욱 넓은 범위에서 폭력을 용인하고 있다. 그래도 최소한 이번 아프간 사태에서 탈레반의 폭력은 거의 모든 사람이 용인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러 있다고 볼 수 있다.

2. 현실적인 고찰

아프간 인질들, 그리고 그들을 아프간에 파송했던 샘물교회에 가해진, 그리고 가해지고 있는 모든 비난들을 자세히 보면, 이 비난이 단지 그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 교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아프간 인질들과 샘물교회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을 포함하는 훨씬 더 넓은 범위의 한국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피해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 역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자를 향한 비난 뒤에는, 그들이 이 말을 들으면서 느낀 폭력성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것이 무조건 최고이고, 그걸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소리지르는 행위’를 폭력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시절에 학교에서 성 문화제 비슷한 행사가 열린 적이 있었다. 행사의 일환으로 중앙도서관 앞에 큰 조형물이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포르노성 매체, 인쇄물 등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 조형물로 인해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들 간의 열띤 토론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한 학생이 이런 요지의 말을 했었다. “이런 조형물을 세움으로서, 원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이 조형물을 보도록 강요당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다.” 나도 매우 공감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권리만큼이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는 권리 역시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할 수 있는 권리에 비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더욱 본질적으로 중요한 권리인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원치 않는 어떤 일을 당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명백한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최근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성희롱, 성 폭력에 대한 논의도 이런 점에서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포교 행위로 인해 원치 않는 말을 듣거나 하는 경우에 이것을 폭력이라고 느끼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고찰한대로, 모든 사람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밖에 없다. 따라서, 크던 작던 사람들의 생각이 충돌하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폭력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하고,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모든 가치관의 충돌은 법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 없는 일이라면 일단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하철 전도자의 시끄럽고 폭력적인 말 역시 그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지하철 역에서의 목탁 소리, 혹은 좋은 음악 소리라고 하더라도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심리적으로 피해를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단지 그렇게 당했다고 느끼는 폭력 때문에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그 이면에는 평소에 교회가 보여준 몰인정함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교회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고집스런, 그리고 이기적인 존재로 비추어져 왔는지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지금까지 보여준 이기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피랍자들을 향한 일반 대중들의 비난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그 논의의 줌심에 이른바 ‘국익’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데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존중해 주는 것이 민주주의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개념이 모호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매도할 수 있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다수가 모든 종류의 소수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억누르는 폭력이다. ‘다르다’와 ‘틀리다’가 혼용되는 언어적인 현상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르다’를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수가 소수를 향하여 보여주는 억압과 폭력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이런 억압과 폭력은 스스로가 다수에 속해있음을 인지하게 해 주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의 ‘디 워 논쟁’이나 ‘아프간 피랍자 사태’ 모두가 많은 사람들이 (특히 네티즌들이) 얼마나 다수에 속하고 싶어하는가, 그리고 그 다수에 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차별 등 우리 사회에서 근간에 문제가 되어온 많은 사회 현상들이 바로 이런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억압, 폭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아프간 피랍자에 대한 사회적인 폭력은 이런 현상 중에서, 지금까지는 이른바 다수에 속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최소한 소수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기독교라는 대상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전까지의 현상과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기독교는 자신이 어떻게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잃고 소수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잠시 선교의 방향을 바꾼다거나 자숙하는 정도의 행동으로 이런 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더욱더 큰 교만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신앙의 수준

내가 구독하는 팟캐스트 중에 김동호 목사의 작은 이야기라는 것이 있다.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들어본 것은 단 한 번 뿐이지만, 그분에 대한 이야기나 소식, 그리고 그 분이 쓴 책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또 경험을 한 터라 한국 기독교계에서 나름대로 존경을 받으실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한 두 주 정도씩 팟캐스트가 올라오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 그리스도 고난에 참여하는 자라는 제목의 설교말씀이 올라왔다.

장면 1. 중세 교회. 큰 성당을 짓기 위해 교회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본인의 죄만을 용서해준다는 면죄부를 팔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대담해져서 죽은 사람을 위한 면죄부까지 팔기 시작한다. “당신의 헌금이 헌금 주머니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그 순간, 당신의 어머니(혹은 아버지)는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시게 된다”는 말과 함께.

장면 2. 미국 수정교회의 건축 당시. 일정액 이상의 건축헌금을 내는 사람들에게 각각 동메달, 은메달, 금메달을 준다. 그리고 그 이상 큰 헌금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따로 공간을 마련해서 이름을 새겨준다. 아예 대놓고 모금운동을 하는 것이다.

장면 3. 어느 한국 교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목사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설교가 행해진다. 예수님을 사랑하니 헌금으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사용되는 교회가 수백억의 돈을 들여 만들어진다.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일정액의 돈을 걷어서 교회에 뭔가 선물을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게 싫다고 하더라도 혼자만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승진(?)하는 마당에 믿음없는 일을 해서는 되겠는가.

장면 4. 또다른 한국 교회.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헌금”이나 “헌신”에 대한 설교를 잘 하지 않는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칭찬을 하지도 않고, 직분을 맡게 되었다고 해서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래서 이 교회를 Cool하다고 표현한다.

김동호 목사님의 고민은, 도대체 이 네 가지 장면에서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일면 Cool 해보이는 장면 4의 교회가 실제로 장면 3의 교회보다 헌금이 훨씬 적게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축복과 헌금을 맞바꾸기 위해 헌금을 많이 하는 것”과 “축복과 헌금을 맞바꾸려 하지 않기에 헌금을 많이 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헌금의 크기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이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 봐도 돈을 많이 낼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뜻인 것도 같다. 돈의 절대적인 크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돈의 상대적인 크기는 분명히 믿음과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믿음이라는 말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삶의 어느 한 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와 닮아있는가 하는 것이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금을 많이 하는 것도 분명 좋은 믿음의 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마음으로 헌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믿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지 않고 이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교회에 내는 돈이 “자신의 심리적인 죄책감을 줄여주는 값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돈이 어떻게 사용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항상 “물질적인 것”으로 축복하시는 분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욥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되게 사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 아닌가. 예수님의 삶은 가장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었지만 잠시의 영광도 채 누려보지 못한 채 비참하고 처절한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삶은 잊어버린채 “세상에서 잘 사는” 축복에 눈이 멀어 있다면,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수준은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쳐다보지 않는 신앙의 열정은 미안하지만 모두 금송아지일 뿐이다.

열 권의 책보다 한 마디의 말

사실 요즘 시간이 없다.

그것도 있고, 맥북이 꽤 무거워서 책 또 들고 다니기가 좀 부담스럽다.

사실은 요즘 멋진 podcast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내내 그걸 듣고 있으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열 권 스무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시간이다.

최근에 iTunes U라는 서비스가 생겼다. 미국의 각 대학에서 제공하는 리소스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제공하는 http://itunes.stanford.edu 에서 ‘Historical Jesus’라는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Thomas Sheehan교수의 강의이다.

Historical Jesus라면 지난 몇 년간 나의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주제이다. Sheehan 교수의 강의는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대부분의 중요한 사실들을 모두 커버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서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사실 많은 부분들이 이미 몇 년 간의 체계없는 독서를 통해 이미 읽거나 생각한 부분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의 비체계적인 독서가 그의 강의를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 같다.

열 권 스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어떤 때는 전문가의 한 마디가 더욱 가치있는 경우가 있다.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지식과 독서의 편린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려울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관련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지닌 좋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내가 배우고 생각하고 읽은 것들을 정리하여 포스팅을 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쉬운 일도 아니고 간단하게 끝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예상하면서 말이다.

우리 민족의 희망

부흥전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각처 교회에 영화(靈火)가 붙었다는 일이 반드시 조선에 희망을 초래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도 과거에 경험한 바이요, 사회 전반이 기독교적으로 변하여 상고(商賈)까지도 예수쟁이 행세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이 되는 일도 조선에 희망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은 서북지방에서 벌써 시험제(試驗濟)가 된 일이었다.

그 밖에 신학을 지원하는 청년이 많음이라든지 독립 전도의 비장한 결심으로써 구령(求靈) 사업에 진출하는 이를 보았으니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일로써 희망이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학이나 전도에만 거룩함이 있고 갱생의 희망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다. 양돈과 양계에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산란의 일자와 계보의 정부(正否)를 속이지 말면서 성전(聖前)에서 행하는 일이면 다 거룩한 일이요, 희망이 전족(全族)에게 임하는 대사업이다.

우리의 희망은 그대한 사업 성취나 혹은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은 참패(慘敗)로써 세상을 마친다 할지라도 참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노역하는 자면 우리의 희망은 전혀 그에게 달렸다.

  •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년 3월)

평양대부흥이 일어나고 30년후에 김교신 선생이 내린 평가가 이렇다면, 2007년에 부흥을 갈망하는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점은 무엇인가.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희망이 있다? 아무 것도 성취한 것이 없이 그리스도와 같은 참패로 세상을 마친다 할지라도 그에게 희망이 있다? 바로 그거다.

우리 민족의 희망은 그야말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생각하고 걸어가며,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라면 모두가 거룩한 일이고 희망이 있는 일이다. 이 민족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왜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비난받고 있겠는가!

김홍도 목사님 설교 – 가슴이 아프다

오마이뉴스에서 ‘이명박 지지 금식기도’를 멈추십시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또 한 번 아득해 지는 마음…

설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어 금란교회 홈페이지에 가서 금주의 설교 내용을 확인해 봤다. 사실이다! 이 내용들은 모두 금란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설교 내용에서 그대로 긁어온 것이다.

금년 말 대선이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요, 그 전이 한나라당의 경선 후보 결정하는 일입니다. 어쨌든 친공, 친북, 반미의 좌파가 다시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대선 < 한나라당 경선 후보 밖에 존재하지 않으니 무조건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이 되어야겠군. ‘친공 = 친북 = 반미 = 좌파’라는 어설픈 논리에 대해서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자본주의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단, 청지기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자기만 위해서 재물을 땅에만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 의 뜻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 영원한 상급을 받는 길이며 땅에 축복의 씨앗을 심어서 자신과 후손들이 복 받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그 근거라는 것이 기껏해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부자였다는 것이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이런 식으로 사례를 통해 증명을 하기에는 반례가 너무 많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성경 구절, 그리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김홍도 목사님은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 김홍도 목사님이 지지하고 있는 이명박 장로님이 자기만 위해서 재물을 땅에만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눠주라는 것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시는걸까?

지금 우리는 붉은 용의 세력에 짓밟혀 처참하게 망하느냐, 사탄을 격파하고 승리하여 선교대국이 되어 축복을 받느냐의 기로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방식이 지겹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섬뜩하게 느껴진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킴노박”이 합세하여 이명박을 죽이려 한다고 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가 합세하여 죽이기 작전을 편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회창씨 죽이듯 온갖 계략과 거짓으로 공격하고 때리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전 행자부장관도, 모 연예인도, 이제는 발 벗고 나서야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발표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가 교황을 뽑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흠집을 내려고 하 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흠집을 내려고 하는가 하는 이도 있습니다. 좌우간 “차떼기당”이거나 “부동산 투기”를 했던 간에 다시는 붉은 용의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합심하여 기도해야겠습니다.

대통령을 뽑는게 교황을 뽑는게 아니니 그냥 사소한건 넘어가자 뭐 그런 말인가보다. 차떼기를 했건 부동산 투기를 했건 상관없으니 무조건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뭐 이런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친북 좌파 세력은 이명박씨를 대선에 못 나오게 하고 다음에는 박근혜씨를 잡으려들 것입니다. 기왕이면 예수님 잘 믿는 장로가 되기를 기도해야겠고 아니면 박근혜씨라도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주일 예배 설교 말씀으로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선관위에서는 쓸데없이 네티즌들 건드리지 말고 이런 분명한 선거법 위반에 대해 단속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면 또 종교를 탄압한다고 난리가 나겠지.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김홍도 목사님이 믿는 예수님과 같은 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전혀 다른 분일거라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금란교회의 대예배에서 이런 설교가 선포되고 있다면 정말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천박한 논리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나 무시하는 것이다. 지난번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 대한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너무나 서글픔과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라고 외치는 조갑제씨나 김홍도 목사님이나 전혀 다를게 없다. 그저 자신의 목적만이 있을 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꾸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인다. 많이 기도하라는 말씀인거 같다. 정말 금식이라도 선포하고 기도를 해야 할 것 같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

조갑제 닷컴에 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가라는 글이 실렸다. 글을 쓴 목적은 결국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두둔하고 보호하는데 있는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요새 유행하는 도덕성 검증은 게으른 좌파들이 만든 것인데, 무능한 자를 도덕군자, 유능하여 일을 많이 하다가 실수도 조금한 이를 부패분자로 몰려는 함정이다. 이 함정에 빠진 것이 한나라당이다.

결국 ‘유능하여 일을 많이 하다가 실수도 조금한 이’가 이명박씨라는 것이고, 검증으로부터 자유로운 깨끗한 후보가 있다면 그는 ‘무능한 자’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논평할 가치조차 없겠지만, 그 주장의 논거로 들고 있는 긴 분량의 전반부가 눈길을 끌었다.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25절(Mat 25:14-25 KOR)까지 나오는 이른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동일한 텍스트를 보고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단락의 이야기가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에 중심을 두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앞뒤의 문맥이나 이 비유가 나온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목적은 ‘언제 올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 단락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은 밝히더라도, 세부적으로 조갑제씨가 말한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어쨌든 이야기의 세부 내용을 통해 나타나는 작은 부분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갑제씨의 성경 해석이 잘못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있다. 즉, ‘주인=하나님=예수님, 종=인간’이라는 등식에 맞추어놓고 해석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이 드문 일은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는 아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으며, 일부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 적용에 있어서 엄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갑제씨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몰라도, 성경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가 되어 있다. 그것이 공동체의 단합을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희년의 법칙은 분명히 자본주의적 사상을 근본적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50년이 지나면 모든 종 된 사람을 풀어주어야 하고, 부득이하게 땅을 판 사람이 있으면 그 땅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희년에 해야 할 일이다. 이건 매수자의 권리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제도의 이면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찾아볼 수 있다. 최소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개인주의적 번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비전이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의 주인과 하나님을 등치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달란트=재능’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주인과 셈을 해야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에 의해 이후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최소한 내 해석으로는 그렇다.

조갑제씨의 말처럼 근대 자본주의가 청교도의 사상적 뒷받침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실, 근면, 절제, 검소 등의 청교도적인 가치관과 자본주의의 결합이 유럽 세계의 번영에 큰 역할을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지지한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조갑제씨의 달란트 비유 해석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끌어다 쓰는 성경 해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고 싶은 말에 집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하고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힙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님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Again 1907?

지난 7월 8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를 새로운 부흥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와 노력이 전 한국 기독교를 망라해서 진행되었고, 그 노력의 정점에 이 행사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부흥이라는 대전제에 찬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올해 읽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흥을 추구하는 목적이 성도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있다면,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다면, 부흥의 당위성부터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행사는 열리고 있는 것이니… TV로 생중계되는 것을 봤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말씀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히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오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1-3)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말씀을 하기가 차마 힘든 모습이었다. 자신의 삶을 헌신적으로 드리고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을 알고 있기에 힘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선언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뭐 대단한 고백도 아닐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행위 없음으로 연결되는 기가막힌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값싼 선언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수많은 목사님들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변개시키는 것이었다는 고백이 있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질책이었고,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으며, 그것은 곧 나를 향한 질책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정말 아쉬운 것은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듣기 싫은 말씀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행사를 계획하면 그렇게 된다. 한시간은 회개하고 한시간은 용서를 선포하고, 그 이후에는 비전을 나누고… 뭐 대강 이런 식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철저해야 할 회개의 시간은 그저 잠시의 가슴아픔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나운서들에 의해 진행된 뒷 순서는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멘트로 치장되고 있었다.

단상에 올라와 말을 했던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철저한 회개,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에서 나타난 전인적이고 철저한 회개가 이번 집회에서 이루어졌는가? 물론 이 집회의 규모와 특성상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회는 그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에 ‘이랜드 기도실’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려 있는 댓글들… 기독교인들의 위선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했고, 그런 댓글들이 모두 높은 찬성을 받고 있었다. 최근에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볼 수 있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틀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고, 오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욕을 먹고 있었다.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면서, 삶 속에 어떻게 공의를 실천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아니 아예 그런 고민 자체를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지금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냉혹한 삶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흩어져서 고립되어 있다. 내가 느끼고 있는 무기력함은 아마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 대신 부동산 투자에 대한 책을 탐독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아득한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흥은 이런 철저한 무기력함의 고백에서 시작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내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더 깨져야 하고, 좀더 무너져야 한다. 내 생각과 방법이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무너지고, 더 많이 부서지는 것이다. 한 번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은, 1907년의 부흥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서 해석

어떤 의미에서든 성경만큼 많이 연구되고 있는 문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만큼 광범위하게 오해되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해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경 해석의 역사는 성경 오해의 역사다라고까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와 원칙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도 성경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서중석 교수님이 쓴 복음서 해석은 그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책이다. 사실 오래전에 서중석 교수님의 <청정한 빛>이라는 책을 읽고 꽤 자극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의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책 하면 의례히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씌여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뿐더러 요즘과 같은 광범위한 지식의 교환이 가능해진 것은 그야말로 몇십년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이 쓰여진 시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약의 텍스트는 모두 매우 한정되어 있는 소수의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책들이다. 복음서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들은 각각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공동체를 향하여 쓴 글들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큰 규모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비밀결사와 같이 매우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규명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아는 것이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네 개의 복음서가 각각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매우 한정된 소수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그것이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핵심 내용과 정신이 유지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그런 공통적인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그 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혼자 성경을 백번 읽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연구자의 연구 결과를 찾아서 읽는 편이 훨씬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혼자만의 독서는 자신의 세계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경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는 책이라면, 그리고 그 연구의 결과가 2천년동안 쌓여온 것이라면 그 방대한 연구의 결과 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해석이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

교회에서 이런 책에 있는 내용을 설교로 하기는 어렵다. 설교는 성경에 대한 연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기초적인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오해들을 살펴본다면, 교회에서도 성경을 학문적으로 가르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가 공동체, 누가 공동체, 마태 공동체, 그리고 요한 공동체의 성격에 대한 대체적인 파악을 할 수 있었고, 이런 공동체들이 비교적 작은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많은 대립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였다는데 약간 놀랐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어느 공동체이든지간에 이런 대립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기본이 되는 도그마들이 놀랍도록 유지되어 온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계속해서 바울 서신에 대한 연구 서적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genie 8951100227]

순전한 기독교

올해들어 스물 다섯번째로 읽은 책은 C.S. 루이스가 쓴 순전한 기독교이다.

오래전부터 읽혀오던 좋은 책이지만, 그동안 읽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자그마한 paperback으로 저렴하게 재출간이 된 것을 보고 쉽게 구입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읽기 쉬운 책은 아닌데, 읽다보니 거의 하루만에 전체를 다 읽어버렸다.

방송용 원고를 묶은 책인만큼 어투나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한 것으로 보이고, 술술 잘 읽혔다. 다만 번역 제목에 있어서 순전한 기독교 보다는 그냥 기독교 정도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모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에게 강추!

도올의 신학논쟁

도올 김용옥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마도 최근에 발표된 그의 책인 기독교 성서의 이해, 그리고 요한복음 강해, 덧붙여서 그의 EBS 강의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학문적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도올의 이번 대상은 기독교인 셈이다.

내가 자주 가는 기독교 신문사 사이트인 뉴스앤조이에서도 이에 대한 논쟁이 한참이다. 그림에서처럼 홈페이지의 ‘신학마당’이라는 코너에서는 아예 도올과 관련된 기사만이 링크되어 있다.

dool

신학과 관련된 이전의 다른 논쟁들과 이번 도올 논쟁이 가장 다른 점은, 도올 논쟁이 EBS, 한겨레 신문, 오마이 뉴스 등 일반 언론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학 관련 논쟁은 기독교 관련 사이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도올이 가지고 있는 상품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쏟아내는 기독교 관련 이야기는 일반 언론에서 크게 보도가 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특징상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경우 댓글을 통해 나타나는 반응은 기독교에 대한 비방, 혹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를 한물간 어리석은 논리라고 공격하는 것이 쿨해보이는 분위기가 지금의 인터넷 상에서 감지되는 것이다. 도올이 제기하는 신학적 문제에 대한 토론들은 많이 볼 수 없지만, 그가 제기하는 한국 기독교의 현상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생산되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리라.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예컨대 재산, 교회 세습, 정치 세력화, 함량 미달의 목회자, 사학법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고, 그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반성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바란다), 최소한 신학의 문제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도올은 사실 정식으로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내가 그의 책들을 읽어보지 못했으니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다른 기사들을 통해 봤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구약 폐지론 정도로 이름지워지는 듯 하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여호와)가 애굽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는,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며,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

이 바탕에는 기독교 정경론, 그리고 역사적 예수 이해라는 문제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나로서는 그의 책을 읽지 않고, 그의 주장이 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한국 교회의 수준이 이 정도의 문제 제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화를 내야 하는 정도라면 그 자체가 문제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의 신학적 흐름 어쩌구 하는 말은 모르더라도,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되는 말씀들이 대부분 19세기 신학의 내용 조차도 포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볼 때, 어쩌면 깊이는 없이 외형적인 성장에만 주의를 기울여온 과거의 모습들이 이제 하나 둘씩 그 결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사실 성경에 대해 도올만큼만 공부하라는 말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경론은 뭐고 역사적 예수 이해는 뭔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독교인이 많을 것이다.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단순한 진리 만은 아니다. 그 단순함이 정말 단순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깊이있는 생각과 철학에서 나온 단순함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공부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 않고 외치는 단순함이란 단순함이 아니라 무지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무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