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최근에는 주로 리디북스를 이용해서 책을 읽고 있다. 아이폰 5s와 아이패드 3를 쓸 때는 사실 전자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는데, 베가 시크릿노트와 HP 슬레이트 7 태블릿을 사용하게 되면서는 전자책을 읽는 빈도가 많이 늘어났다. 전자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실 책의 부피와 무게 문제도 있고, 독서를 하면서 줄을 치거나 메모하는 것을 싫어하는 습관 때문에라도 나는 전자책을 매우 좋아한다) LCD 화면으로 읽는 것은 눈이 좀 아프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달 전 쯤에는 리디북스 전용으로 쓸 생각으로 교보 Sam을 구매했고 편안하게 전자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꽤 만족하고 있다.

리디북스에서 꽤 많은 책을 구매했는데 최근에는 그 중에서도 How to read 시리즈의 책을 읽고 있다. 이 시리즈에 포함된 책은 마르크스, 니체, 데리다, 프로이트, 라캉, 히틀러, 다윈, 셰익스피어, 성경, 푸코, 융, 사드,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그리고 마키아벨리 등 모두 16권이다. 첫번째로 How to read 마르크스를 읽었고 다음으로는 How to read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은 How to read 다윈을 읽고 있는 중이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고. How to read 시리즈의 책은 몇몇 원문에 해설을 붙여놓은 식으로 되어 있는데, 마르크스라는 사람의 사상에 대해 그저 수박 겉핥기 식의 지식밖에 없었던 내게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았다. 사실 다 읽고 난 지금도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감은 전혀 잡을 수가 없다.

반면 성경의 경우는 정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평생 읽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생각해야 할 새로운 것이 발견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 ‘How to read 성경‘의 저자인 리처드 할로웨이 주교의 해석과 견해를 읽으면서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비교도 해 보고 내 나름대로 평가도 해 보면서 꽤 많은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독서였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 개신교식의 성경 이해에 좀더 익숙한 상황에서 유럽 가톨릭식의 성경 해석을 보면서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고.

평생 마르크스를 진지한 마음으로 읽어온 사람의 견해를 읽으면서 그걸 한번에 이해해 보자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얄팍한 생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저작을 제대로 읽고 다시 한 번 깊이있게 이해해 보자는 결심이 선 것은 아니다. 이 방대한 시리즈의 책들을 한 번씩은 읽어보고 나서야 다음 독서의 주제가 어떻게 될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깊이있는 인문학 개론서를 읽고 실제로 더 깊이있는 인문학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Book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을 읽기 위한 두 번째 책인 <시라노>를 다 읽었다.

이 책은 17세기 실존 인물인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일생을 모티브로 한 희곡이다. 시라노라는 이름으로 알라딘 검색을 해 보니 정말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책이 한국에 한 권 번역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편의 멋진 오페라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읽으면서 머리 속으로 근사한 한 편의 오페라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제라르 드 파르디유같이 생긴 바리톤 가수가 시라노로 나올 것이고, 감미로운 음성을 가진 테너가 크리스티앙의 역을 맡아야겠지. 록산은 레지에로 소프라노, 드 기슈 백작은 테너로 하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름 멋진 아리아 하나는 배당을 해 주어야 할 것 같아… 아마도 전체적인 음악은 소극장 오페라에 어울리는 가벼움과 예쁜 선율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는 만큼, 도니제티 풍이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이 책을 읽으면서 언어에 대한 지식이 독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어, 그리고 프랑스어 운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다면 이 책이 더욱 재미있게 느껴졌을 것 같다. 물론, 그런 지식이 없는 내게도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시라노와 같이 다재다능한 사람이 자신의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 주는 소극적인 (그리고 비극적인) 짝사랑을 평생 했다는 것이 좀 믿어지지 않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글을 사랑하는 그래서 영혼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여인이 말을 제대로 못하는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보고 사랑이 급격하게 식어지는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책에 담겨져 있는 풍부한 은유와 서정, 해학과 익살은 두고두고 곱씹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야기로서의 다른 약점들은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마지막 결말 부분만큼은 뭔가 좀더 의미있는, 그리고 여지를 남기는 좋은 결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사실 희곡을 이렇게 제대로 읽어본 것은 <실락원>, <파우스트>같은 책을 고생하며 읽었던 이후 약 15년 정도만에 처음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페라를 떠올리게 된 것은, 그 15년의 시간 동안 오페라에 대한 경험이 많이 쌓였기 때문일텐데, 역시 독서에 있어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연극에 그런 관심과 지식이 있었다면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 희곡이 공연화되고 있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을거다.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별 네 개를 줄 수 있는 좋은 책.

책 정보

[genie 8932907013]

Book, Christianity

사실 요즘 시간이 없다.

그것도 있고, 맥북이 꽤 무거워서 책 또 들고 다니기가 좀 부담스럽다.

사실은 요즘 멋진 podcast를 집중해서 듣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내내 그걸 듣고 있으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 어떤 면에서는 열 권 스무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의미있는 시간이다.

최근에 iTunes U라는 서비스가 생겼다. 미국의 각 대학에서 제공하는 리소스들을 모아 놓은 곳이다. 스탠포드 대학에서 제공하는 http://itunes.stanford.edu 에서 ‘Historical Jesus’라는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Thomas Sheehan교수의 강의이다.

Historical Jesus라면 지난 몇 년간 나의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주제이다. Sheehan 교수의 강의는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대부분의 중요한 사실들을 모두 커버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책들을 다 읽으면서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사실 많은 부분들이 이미 몇 년 간의 체계없는 독서를 통해 이미 읽거나 생각한 부분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의 비체계적인 독서가 그의 강의를 통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 같다.

열 권 스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어떤 때는 전문가의 한 마디가 더욱 가치있는 경우가 있다.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지식과 독서의 편린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려울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관련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지닌 좋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내가 배우고 생각하고 읽은 것들을 정리하여 포스팅을 해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쉬운 일도 아니고 간단하게 끝날 일도 아니라는 것을 예상하면서 말이다.

Book

안도현의 연어는 올해 읽은 서른 한번째 책이다. 사실 100쇄나 찍힌 책이라면 이미 읽어봤어야 하는건데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는게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일단 읽었으니 안 읽은 것 보다는 백배 낫다.

저자는 연어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누구도 정답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최소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다.

나는 내 삶에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목적이 내가 살면서 경험하는 여러 아픔들을 뛰어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의미가 있는데, 최소한 다른 것들의 배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귀에 남는다.

[genie 8954603262]

Book

장정일의 공부는 그 내용적인 면에서도 많은 생각할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가 취하고 있는 독서법 역시 내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약 30여권의 책들은 아무리 봐도 그 목록에서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책을 고르고 닥치는대로 읽어나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목록이다. 그래서 어쭙지 않은 자기 개발 관련 도서에서부터 신앙 서적, 그리고 소설, 시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장정일은 그렇게 책을 읽는 것 같지 않다.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읽어서일수도 있지만, 그는 동일한 주제 혹은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몇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내는 식의 독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독서의 장점은 그가 적고 있는 독후감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여러 상이한 시각을 통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공부에 대한 정의와 일통하는 것인데, 민주주의가 의견와 의견의 부딪힘이고, 그런 의견의 교환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독서법을 통해 진정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이 무슨 거창한 방법은 아니다. 내가 연구를 할 때에도 어떤 종류의 일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연구 주제와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모으고, 그 논문들을 읽고 정리하면서 주제에 대한 배경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의 가치와 특수성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 연구 과정에서 후회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연구 분야에서는 항상 이런 공부 방법을 적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공 분야의 연구가 아닌 교양을 위한 책읽기에서는 이런 방법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기본적인 책읽기의 넓이가 너무 좁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깊게 읽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넓이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기본은 있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대학생이 읽어야 할 교양도서 100선> 따위의 추천 목록에 있는 책 중에서 절반도 읽어내지 못한 내 상황에서는 넓게 읽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박사라는 것은 박학다식한 선비라는 뜻일진대 배움의 넓이가 넓은 사람이라는 뚯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매우 한정된 분야에서 조금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책읽기에 있어서 (혹은 교양에 있어서) 충분한 정도의 넓이라는 것은 참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이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종합적인 인간형을 추구하는 것은 지금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일하고 있는 좁은 분야에서 충분히 깊게 읽는 것도 너무나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넓이와 깊이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장정일의 책읽기 전략을 따라서 한 주제에 관해 최소한 서너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방법을 쓴다고 하면 어떤 주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걸까? 나와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항상 인문학자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푸코, 데리다 같은 사회학자들에 대해 읽어야 하는걸까? 아니면 정치? 혹은 경제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할까?

결국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읽느냐의 문제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 한 때, <역사적 예수>라는 주제에 심취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책들을 구할 수 있는대로 구해서 읽었던 때가 있다. 이 때의 책읽기는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나서 그 영향으로 시작이 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거나 충격을 받은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책읽기를 깊이있게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예수의 생애>만큼 내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것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때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추’를 읽고 에코의 글쓰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온 그의 장편소설들을 (바우돌리노까지) 다 구입을 해서 읽었다.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어느 것 하나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엄청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지적 유희를 즐기는 그의 소설이 나름대로 지식에 대한 내 갈증을 자극하는 것을 즐기면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사람인 에코가 중세 유럽의 역사에 해박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것이고, 내가 중세 유럽의 역사를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내가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도 된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구입하면서 집어넣은 책이 다산 정약용에 대한 책이었다.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는 것도 가능해지면 좋겠지만.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초점이 없는 글이 된 것 같지만, 최소한 내가 2007년 초부터 지금까지 해온 책읽기의 방식이 너무나 중구난방 일관성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해 보고, 앞으로는 교양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연구와 생각에 의해 독서 목록을 정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전에 쓴 책읽기 관련 포스트

Book, Christianity, Life

[genie 8925503026]

장정일의 공부

지난번에 장충동 김씨의 책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책의 저자와 최근 작가들의 질투어린 선망의 대상인 장정일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도 참 잘 지었다. 공부!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책의 뒤표지에 나와있는 저자의 공부에 대한 정의, 그리고 한 두 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우선 장정일의 공부의 정의.

> 공부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무엇보다 개념과 논리를 서로 이해하고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모르면 남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서로 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내가 평소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양을 쌓는 일이라는 말과 바꾸어 써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교양을 쌓기 위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중학생 때, 교양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내 인생의 목표 중 한 가지로 정한 일이 있다. 그리고 그 교양이라는 것의 정의를 나름대로 내려보았었고,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정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 주체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

내가 정의한 교양은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 있어 사안에 따라 외부의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변화하는 불안정한 단계를 벗어나서, 스스로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장정일은 달랐다 그는 이미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서로 이해하고 있는 단계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이후에서야 그 차이를 인정하든 아니면 내 견해를 수정하든, 혹은 상대방을 설득하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장정일의 교양은 스스로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그 견해의 요지를 파악하여 스스로의 견해와 비판적으로 대조하는, 그리고 그 자양분을 흡수하는데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교양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다르면, 당연히 교양을 쌓기 위해 하는 노력에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의 정의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달려 있다. 많은 경우에 적절한 질문은 적절한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공부 방법은 내 공부 방법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장정일의 공부 방법이라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책이 장정일의 독후감 모음이라는 점이 1년에 50권 책 읽기를 하고 있는 내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서 글을 써 볼 예정이다)

교양의 정의를 스스로 바꾼다고 하는 것은, 내 삶의 중요한 목표 하나를 수정한다는 것이고 그런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러나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가지 않는 것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 삶은 정체된 삶이라고 생각하기에 어쩔 수가 없다. 최소한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거기에 덧붙여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이해하고 그 견해와 내 견해의 차이점을 분석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내가 바로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저 (강명식의 <십년 후엔>이라는 노래에서 말하듯이) 그 때까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십년을 하루 같이 황소 걸음으로 걸어간다면 그 곳에 더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