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해석

어떤 의미에서든 성경만큼 많이 연구되고 있는 문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만큼 광범위하게 오해되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해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경 해석의 역사는 성경 오해의 역사다라고까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와 원칙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도 성경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서중석 교수님이 쓴 복음서 해석은 그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책이다. 사실 오래전에 서중석 교수님의 <청정한 빛>이라는 책을 읽고 꽤 자극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의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책 하면 의례히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씌여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뿐더러 요즘과 같은 광범위한 지식의 교환이 가능해진 것은 그야말로 몇십년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이 쓰여진 시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약의 텍스트는 모두 매우 한정되어 있는 소수의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책들이다. 복음서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들은 각각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공동체를 향하여 쓴 글들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큰 규모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비밀결사와 같이 매우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규명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아는 것이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네 개의 복음서가 각각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매우 한정된 소수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그것이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핵심 내용과 정신이 유지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그런 공통적인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그 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혼자 성경을 백번 읽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연구자의 연구 결과를 찾아서 읽는 편이 훨씬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혼자만의 독서는 자신의 세계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경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는 책이라면, 그리고 그 연구의 결과가 2천년동안 쌓여온 것이라면 그 방대한 연구의 결과 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해석이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

교회에서 이런 책에 있는 내용을 설교로 하기는 어렵다. 설교는 성경에 대한 연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기초적인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오해들을 살펴본다면, 교회에서도 성경을 학문적으로 가르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가 공동체, 누가 공동체, 마태 공동체, 그리고 요한 공동체의 성격에 대한 대체적인 파악을 할 수 있었고, 이런 공동체들이 비교적 작은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많은 대립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였다는데 약간 놀랐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어느 공동체이든지간에 이런 대립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기본이 되는 도그마들이 놀랍도록 유지되어 온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계속해서 바울 서신에 대한 연구 서적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genie 8951100227]

비밀은 없다

  1. 들어가는 글

    오마이뉴스에서 비밀은 쿰란동굴에 유폐되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쿰란이라는 책에 대한 일종의 소개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0년에 나왔으니 출판된지 꽤 된 책인데, 이런 기사를 통해 언급을 하는 것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이후로 이런 종류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오래 전에 이 쿰란이라는 책을 읽었고, 오래전부터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기사를 관심있게 읽어보았다.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였다라던가 하는 부분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게 내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대한 언급 부분은 사실 좀 토를 달지 않을 수 없다.

  2. 성전 논쟁

    예수는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논쟁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예수는 이미 에세네파의 관습에 따라 에세네파에 입문한 것이다. 그리고 논쟁에 필요한 교리와 성서지식들을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이야기는 복음서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말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매우 평범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공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 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좀더 제대로된 증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3. 제자들의 삶

    예수가 제자들을 맞아들이자, 제자들은 모두 직업을 버리고 맨 몸으로 예수를 따라온다. 이것 또한 속세의 직업을 버리고 공동재산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의 관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수는 부자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예수님의 생애를 금욕적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때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미지와 세례 요한의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겼고,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처럼 외양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은 쉽게 선지자로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처럼 평범한 사람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에게는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다닌 예수님의 모습은 역사적 예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도리어 견유철학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에세네파였다면 제자들을 이끌고 광야나 산으로 가서 숨어지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제도권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가설이 설득력이 없다.

  4. 40일의 금식

    예수는 유다사막에서 40일 동안 수행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40일 동안 예수가 살아남았던 것은, 바로 유다사막에서 은둔하고 있던 에세네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공백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40일의 금식 기간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 기간 동안 에세네파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가장 치열하게 전개될, 그리고 가장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삶의 여정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40일은 예수님에게 매우 가치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40일의 여정과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사투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5. 결론

    뉴스 기자의 글에 언급된 이야기만 하다보니 세 가지 이야기만 쓰고 말았다. 물론 더 할 말은 많이 있다. 굳이 결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진리는 단순하다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그럴듯한 이론을 찾아 헤맨다. 진실이 그렇게 간단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도 그랬고, 유행하고 있는 음모 이론도 그렇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말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굳이 오캄의 면도날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진실은 간단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거의 다 알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스스로 의도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 스스로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분의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복음서나 바울 서신과 같은 초기 저작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 위한 헛된 노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