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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연어

안도현의 연어는 올해 읽은 서른 한번째 책이다. 사실 100쇄나 찍힌 책이라면 이미 읽어봤어야 하는건데 아직도 읽지 못하고 있었다는게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일단 읽었으니 안 읽은 것 보다는 백배 낫다.

저자는 연어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누구도 정답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이지만, 최소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다.

나는 내 삶에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목적이 내가 살면서 경험하는 여러 아픔들을 뛰어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의미가 있는데, 최소한 다른 것들의 배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귀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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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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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지난번에 장충동 김씨의 책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책의 저자와 최근 작가들의 질투어린 선망의 대상인 장정일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도 참 잘 지었다. 공부!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책의 뒤표지에 나와있는 저자의 공부에 대한 정의, 그리고 한 두 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우선 장정일의 공부의 정의.

> 공부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무엇보다 개념과 논리를 서로 이해하고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모르면 남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서로 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내가 평소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양을 쌓는 일이라는 말과 바꾸어 써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교양을 쌓기 위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중학생 때, 교양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내 인생의 목표 중 한 가지로 정한 일이 있다. 그리고 그 교양이라는 것의 정의를 나름대로 내려보았었고,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정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 주체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

내가 정의한 교양은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 있어 사안에 따라 외부의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변화하는 불안정한 단계를 벗어나서, 스스로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장정일은 달랐다 그는 이미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서로 이해하고 있는 단계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이후에서야 그 차이를 인정하든 아니면 내 견해를 수정하든, 혹은 상대방을 설득하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장정일의 교양은 스스로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그 견해의 요지를 파악하여 스스로의 견해와 비판적으로 대조하는, 그리고 그 자양분을 흡수하는데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교양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다르면, 당연히 교양을 쌓기 위해 하는 노력에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의 정의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달려 있다. 많은 경우에 적절한 질문은 적절한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공부 방법은 내 공부 방법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장정일의 공부 방법이라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책이 장정일의 독후감 모음이라는 점이 1년에 50권 책 읽기를 하고 있는 내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서 글을 써 볼 예정이다)

교양의 정의를 스스로 바꾼다고 하는 것은, 내 삶의 중요한 목표 하나를 수정한다는 것이고 그런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러나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가지 않는 것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 삶은 정체된 삶이라고 생각하기에 어쩔 수가 없다. 최소한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거기에 덧붙여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이해하고 그 견해와 내 견해의 차이점을 분석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내가 바로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저 (강명식의 <십년 후엔>이라는 노래에서 말하듯이) 그 때까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십년을 하루 같이 황소 걸음으로 걸어간다면 그 곳에 더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선물

올해 스물 여덟번째로 읽은 책은 스펜서 존슨의 선물이다. 2003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벌써 나온지 4년이 지난 책이지만, 정작 내 서가에는 없었고, 동생의 서가에서 꺼내왔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두번째 이야기라고 되어 있는 것은, 결국 간단한 우화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 이전에 읽은 <에너지 버스>류의 책과 비슷할거라는 생각을 했다.

  1. 현재 속에 살기
  2. 과거에서 배우기
  3. 미래를 계획하기

귀중한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소개된 이 세 가지 방법은 어떤 면에서는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사람 사는데 뭐 특별할게 있겠냐만은 언제나 진리는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쉬워보여서 진리가 아닌 것 같아보인다. The Present가 선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현재라는 뜻이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 현재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사실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라는 뜻의 현재 속에 살기, 과거의 성공과 실패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는 과거에서 배우기, 멋진 미래를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라는 뜻의 미래를 계획하기, 그 세 가지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들 이 이야기가 잘못되었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은 그렇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은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어서일수도 있고, 실천을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무언가를 깨닫고 행동으로 옮기는데 아는 것 이상의 뭔가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에너지 버스>를 읽고 느낀 것과 마찬가지지만, 깨달음이 없어서 무언가를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끊임없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닌 듯 하다.

역시나 해 아래 새 것은 없고, 잠언류의 책은 잠언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두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고, 삶의 활력은 내 혼자 힘이 아니라 삶의 근원을 공급하시는 그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마음

올해의 스물 일곱번째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다.

이 책은 읽기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좀 힘들었는데, 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주저하고 있다가 막상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거의 중단 없이 두세번 만에 모두 읽어버리고 말았다.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가 현재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를 장식하고 있고 일본인의 정신적인 지주라고까지 이야기되고 있다고 하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것이 이 작품이라고 하는 만큼, 일본인들의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독서를 시작했다.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해 본다면, 재산 문제 때문에 자신을 배반하는 작은 아버지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 때문에 자살했다고 생각하는 친구 때문에 나 역시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는 생각을 더해서 결국은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선생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책의 선전 문구에 나오는 인간의 ‘에고이즘’과 죄의식의 작용을 치밀하게 묘파해 낸 문제작이라는 말이 어울리기에는 (지금의 내 눈으로 보기에는) 치열함과 당위성이 좀 부족해 보인다.

자유와 에고를 획득한 댓가로서 맛보지 않으면 안되는 현대인의 고독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는 말에도 그닥 공감이 가지 않는다.

죄의식의 문제를 다룬 문학 작품들은 꽤 여러 가지가 있고, 어떤 면에서 인간의 이런 본성에 대한 고찰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다루어져온 주제이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돈 때문에 조카를 멀리하는 작은 아버지의 모습 정도에서 이끌어낸다고 하는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치기 어린 일인 것 처럼 보이는데다가, 별 일도 아닐 수 있는 문제 때문에 굳이 자살을 선택하는 친구 K군, 그리고 그 친구를 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을 택하는 선생님 역시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치기 어린 행동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메이지 시대의 종말’ 즉 천황의 죽음과 자신(및 자신의 시대)의 죽음을 동일시하는 부분에서는 일종의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의 결론이 결국 죽음밖에 없다는 것은, 치열하게 삶에 대한 고민을 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는 치열함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정립한 사람들에게는 비겁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

지킬만한 것이 많이 있겠지만 마음을 지키는 것이 그래서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