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시리즈 책을 두 권 읽고…

최근에는 주로 리디북스를 이용해서 책을 읽고 있다. 아이폰 5s와 아이패드 3를 쓸 때는 사실 전자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는데, 베가 시크릿노트와 HP 슬레이트 7 태블릿을 사용하게 되면서는 전자책을 읽는 빈도가 많이 늘어났다. 전자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사실 책의 부피와 무게 문제도 있고, 독서를 하면서 줄을 치거나 메모하는 것을 싫어하는 습관 때문에라도 나는 전자책을 매우 좋아한다) LCD 화면으로 읽는 것은 눈이 좀 아프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달 전 쯤에는 리디북스 전용으로 쓸 생각으로 교보 Sam을 구매했고 편안하게 전자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꽤 만족하고 있다.

리디북스에서 꽤 많은 책을 구매했는데 최근에는 그 중에서도 How to read 시리즈의 책을 읽고 있다. 이 시리즈에 포함된 책은 마르크스, 니체, 데리다, 프로이트, 라캉, 히틀러, 다윈, 셰익스피어, 성경, 푸코, 융, 사드,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그리고 마키아벨리 등 모두 16권이다. 첫번째로 How to read 마르크스를 읽었고 다음으로는 How to read 성경을 읽었다. 그리고 지금은 How to read 다윈을 읽고 있는 중이다.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사실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었고. How to read 시리즈의 책은 몇몇 원문에 해설을 붙여놓은 식으로 되어 있는데, 마르크스라는 사람의 사상에 대해 그저 수박 겉핥기 식의 지식밖에 없었던 내게 이 책은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았다. 사실 다 읽고 난 지금도 마르크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감은 전혀 잡을 수가 없다.

반면 성경의 경우는 정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평생 읽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생각해야 할 새로운 것이 발견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이 ‘How to read 성경‘의 저자인 리처드 할로웨이 주교의 해석과 견해를 읽으면서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비교도 해 보고 내 나름대로 평가도 해 보면서 꽤 많은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독서였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 개신교식의 성경 이해에 좀더 익숙한 상황에서 유럽 가톨릭식의 성경 해석을 보면서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고.

평생 마르크스를 진지한 마음으로 읽어온 사람의 견해를 읽으면서 그걸 한번에 이해해 보자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얄팍한 생각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저작을 제대로 읽고 다시 한 번 깊이있게 이해해 보자는 결심이 선 것은 아니다. 이 방대한 시리즈의 책들을 한 번씩은 읽어보고 나서야 다음 독서의 주제가 어떻게 될지 결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런 깊이있는 인문학 개론서를 읽고 실제로 더 깊이있는 인문학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스도인의 경제관 – 나의 경우

2010년 1월 12일 오전 트위터에서…

Namturtle98 기독교적 경제관은 뭘까. 바울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부를 가지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본주의 사회. 곧 돈이 최고인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lordmiss @Namturtle98 돈을 사랑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성경에 있나요? 별로 고민하실 일이 아닌 듯… ^^

Namturtle98 @lordmiss 그렇군요. 하나님만 따라가다 보면 부는 따라오는 것이겠죠. 단순하게 생각해야겠네요. 반대로 부를 쫓아가는 삶은 결국 디모데 전서의 말씀대로 온갖 악의 뿌리가 되겠죠.

lordmiss @Namturtle98 하나님을 따르는 것과 부가 따라오는 것사이에는 별 연관성이 없어요. 아주 단순하죠.

Namturtle98 @lordmiss 그렇군요. 부자든 가난하든 복음안에선 크게 중요하지 않죠. 바울의 고백대로.   하지만 부자가 되고픈 저의 욕망.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안타깝고 해서 적은 글이랍니다.

Namturtle98 @lordmiss 사실 성경대로의 가치관과 일에 대한 철학. 하나님의 소명 같은 의식이 충분히 뿌리내려 있다면 부자가 안되는게 이상하지 않나 요즘 생각해 봅니다. 혹 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lordmiss @Namturtle98 부자 되지 마세요. 천국 가기 무지 힘들어요. 진짜루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Namturtle98 @lordmiss ㅎㅎ 네. 맞죠. 그런데 전 구원받았고 천국이 제 집이니깐 돈많이 벌어서 교회도 세우고 선교사도 돕고 해야겠죠. ㅎ

Namturtle98 @lordmiss 로드미스님이 담에 블로그에 성공적인 경제관에 대해 깊이있는 글 한번 적어주세요. 제게 적었다고 맨션 함 날려주시구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 글을 적게 된 배경은 위와 같다.

아래에 적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경제관과 관련된 이야기. 별 논리는 없이 적어내려간 내용이다.

1. 성경의 부자 성경에 많은 부자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가난한 사람들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간에, 성경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재물 소유 여부가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사실.

2. 예수님의 경제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재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까지 자신과 같은 생활을 요구하셨다.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있어 ‘돈을 의지하는 마음’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 아닐까.

3. 바울의 경제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바울의 경제관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4. 청부론 얼마전 청부론 논란이 있었다. 하나님의 원칙을 잘 지키면서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이 골자였다고 생각된다. 이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부지런함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라면 훌륭한 개인 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돈을 버는데 있어서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과 부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의미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인 윤리 중에서 부를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검소함과 소명의식 정도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하던지 아니면 사회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돈이 돈을 버는 사회’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부자가 된 케이스를 예로 드는 것은 복권 당첨으로 돈을 번 케이스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검소함과 소명의식이 중요한 개인 윤리이기는 하나, 그 윤리는 부자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지금까지 사람 사는 사회가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런 사회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냉혹한 세상의 논리만 살아남는 곳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권세를 마귀가 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5.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도 짓고 선교사도 후원하면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실까?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짓는 것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큰 교회에 대한 질책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위해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은 발견할 수 없다. 그 분이 인간이 만든 성전 가운데 제한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은 눈에 보이는 멋진 것에 잘 현혹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따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며,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바로 재물이다. 하나님은 결코 재물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드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냥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말했다. 구원받았으니 돈 좀 벌어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선교도 도와야지…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교회건 선교이건간에 돈으로 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이며, 선교에 필요한 것 역시 돈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다. 돈 벌어서 교회에 내 놓고 자기 중심적인 삶에 대한 마음의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그냥 자신의 삶 전체를 내 놓아야 한다. 성경에서 돈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된 사건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 보시라.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도대체 하나님이 왜 자신의 알량한 (그것이 수천억이든 수십조이든간에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재산을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6. 결론 최대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를 해 본다. (사실 사회적인 부분, 공동체성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안타깝지만 내게 아직 그만한 내공이 없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것도 제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재능들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좋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 하고, 어떤 사람은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부른다. 이런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달란트’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물도 그와 같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하나이고,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된다. 어떤 기독교인도 ‘하나님 뜻대로만 살면 키가 커질 수 있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뜻대로만 살면 부자가 될 수 있어’라고 (진심으로) 말한다. ‘재물이 많다’와 ‘키가 크다’, 또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정확하게 같은 레벨에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돈을 버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7. 추가 Namturtle98님의 ‘전 구원받았고, 천국이 제 집이니까…’ 라는 말 속에서 구원관과 관련된 말을 추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구원은 일회적인 사건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강조한다. 바울은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조언한다. 일단 구원은 받았으니, 이제 돈 좀 벌어봤으면 좋겠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구원을 값싼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내 삶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더욱 많이 닮아가야 하는 사명이 있을 뿐, 돈을 벌거나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일 따위의 사명은 없는거다.

성경 번역본 저작권에 대한 생각

성경 번역본에 대한 저작권 설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뭐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대한성서공회의 홈페이지에서 저작권 관련 FAQ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Q.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저작권 허가를 받아야 하나요?
A. 대한성서공회는 개신교의 주요교단으로 조직된 연합기관입니다. 재단법인 대한성서공회의 재산은 한국교회의 재산입니다. 그러므로 저작권 보호는 한국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복음을 전하는 일인데 저작권 허가를 받아야 하냐는 질문에 대해 한국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답변을 내놓고 있다. ‘대한성서공회의 재산’ = ‘한국교회의 재산’ 이라는 등식은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겠지만) 받아들인다고 치고, ‘한국교회의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돈이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 성경 번역본 저작권 행사를 통해 돈 버는 것을 뭐라고 하면 안된다는 뜻일까?

물론, 많은 영어 번역본 역시 저작권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King James Version이나 American Standard Version 정도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고, New International Version이나 The Message 같은 번역본들은 저작권을 얻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의 상황이 어떤 것인가와 관계 없이 성경 번역에 대한 저작권 행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대한성서공회에서는 온라인 성경의 경우 한 역본당 300만원/2년이라는 가격을 제시해 놓고 있으며, 필요한 경우라면 직접 연락을 해서 가격을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 회사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 아닌 이상 개인이 직접 대한성서공회와 이런 부분에 대해 협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성경의 본문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제약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위키피디아의 성경 번역 관련 페이지에서는 개역개정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각종 교단에서 인준했으나 어색하다는 이유로 널리 쓰이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개역한글판 성경의 저작권 만료 기간이 도래함에 따라 2007년부터 점차 보급이 확대되고 있다.

개역개정판을 쓰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개역한글판의 저작권 만료라는 것이다. 이 언급의 진위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다른 근거가 없는만큼 이 말만 놓고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개역한글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개역개정판을 새롭게 쓰게 되면서 생겨난 어마어마한 시장 규모를 놓고 생각을 해 보면 그럴 듯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성경을 많이, 그리고 자주 읽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마다 CrossWire의 프로그램들을 깔아놓고 쓰고 있다. 윈도우, 맥, 리눅스, 그리고 (아이폰을 제외한) 많은 hand-held device들에서 이 프로그램들을 무료로 쓸 수 있으며, 이 프로그램에서 읽을 수 있는 모듈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아주 오래 전이기는 하지만, KDE에서 사용되는 프로그램인 BibleTime이라는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는 내가 번역을 했었다. 지금은 KDE를 쓰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있는데, 1.x 버전에서는 아쉬운대로 한글을 볼 수 있기는 하다) 아쉬운 것은 한글의 경우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추세인 개역한글판만이 사용 가능한 상태였으며, 현재는 그나마도 이용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sword 모듈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내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컴퓨터들에 개역한글판이 깔려 있는 상황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용자들의 경우에는 sword 관련 프로그램으로는 한글 번역본을 읽을 수 없는 셈이다. 이미 여러 기관의 홈페이지에서 여러 번역본이 제공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성경 프로그램, 예컨대 MyBible과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되는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MyBible은 매우 훌륭한 프로그램이고 개역한글판 외에도 개역개정판,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개정판, 현대어 성경, 그리고 쉬운 성경 등 모두 여섯 개의 한글 역본을 제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윈도우가 설치된 컴퓨터에서 설치를 통해서 사용할 수 있을 뿐이고 맥이나 리눅스가 깔린 컴퓨터나 핸드폰, PDA 등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는 방법이다. 번역본의 저작권 행사를 포기하지 않는 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The Holy Scripturizer

The Holy Scripturizer라는 워드프레스 플러그인이 있다. 본문, 페이지 및 코멘트 부분의 텍스트에서 성경 본문에 링크를 걸어주는 플러그인이다.

이 플러그인을 살펴보니 Bible Gateway 사이트를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Bible Gateway 사이트에서는 35개 언어 50개 버전의 성경 본문을 검색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한글 성경의 경우에는 개역 성경 본문만을 제공하고 있다. 영문 성경의 경우에는 NIV, KJV, ESV 등은 물론이고 요즘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The Message 본문도 제공한다.

링크를 위한 ([bible]과 같은) 특별한 구분자를 제공하지 않고 책 이름과 장절의 패턴이 나타나는 것은 모두 변환을 한다는 것이 사용이 편하다는 장점도 있고 다양한 사용을 위해 불편한 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한글 책 이름(마태복음, 마태, 마 등)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이런 불편한 점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 Genesis 1:1 NIV : NIV 버전으로 링크
  • Genesis 1-2 : 장 범위 지정이 가능
  • Genesis 1:1-10 : 물론 절 범위 지정도 가능

한글 성경의 경우 Bible Gateway 사이트의 id가 20번이므로, scripturizer.php 파일에서 아래와 같은 세 줄을 첨가해 주었다. 이렇게 하면 옵션에서 기본 성경을 지정할 때 한글 성경으로 지정할 수 있어서 편하다.

$scripturizer_translations[33][‘abbrv’] = ‘KOR’;
$scripturizer_translations[33][‘name’] = ‘Korean Bible’;
$scripturizer_translations[33][‘gateway_id’] = ’20’;

이렇게 하여 다음과 같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 마태복음 25:1-3절 : Mat 25:1-3 KOR

매우 유용한 플러그인이다. 소스를 살펴볼 시간이 더 있다면 한글 책 이름을 지원할 수 있도록 개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

조갑제 닷컴에 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가라는 글이 실렸다. 글을 쓴 목적은 결국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두둔하고 보호하는데 있는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요새 유행하는 도덕성 검증은 게으른 좌파들이 만든 것인데, 무능한 자를 도덕군자, 유능하여 일을 많이 하다가 실수도 조금한 이를 부패분자로 몰려는 함정이다. 이 함정에 빠진 것이 한나라당이다.

결국 ‘유능하여 일을 많이 하다가 실수도 조금한 이’가 이명박씨라는 것이고, 검증으로부터 자유로운 깨끗한 후보가 있다면 그는 ‘무능한 자’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논평할 가치조차 없겠지만, 그 주장의 논거로 들고 있는 긴 분량의 전반부가 눈길을 끌었다.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25절(Mat 25:14-25 KOR)까지 나오는 이른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동일한 텍스트를 보고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단락의 이야기가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에 중심을 두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앞뒤의 문맥이나 이 비유가 나온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목적은 ‘언제 올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 단락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은 밝히더라도, 세부적으로 조갑제씨가 말한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어쨌든 이야기의 세부 내용을 통해 나타나는 작은 부분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갑제씨의 성경 해석이 잘못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있다. 즉, ‘주인=하나님=예수님, 종=인간’이라는 등식에 맞추어놓고 해석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이 드문 일은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는 아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으며, 일부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 적용에 있어서 엄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갑제씨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몰라도, 성경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가 되어 있다. 그것이 공동체의 단합을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희년의 법칙은 분명히 자본주의적 사상을 근본적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50년이 지나면 모든 종 된 사람을 풀어주어야 하고, 부득이하게 땅을 판 사람이 있으면 그 땅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희년에 해야 할 일이다. 이건 매수자의 권리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제도의 이면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찾아볼 수 있다. 최소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개인주의적 번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비전이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의 주인과 하나님을 등치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달란트=재능’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주인과 셈을 해야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에 의해 이후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최소한 내 해석으로는 그렇다.

조갑제씨의 말처럼 근대 자본주의가 청교도의 사상적 뒷받침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실, 근면, 절제, 검소 등의 청교도적인 가치관과 자본주의의 결합이 유럽 세계의 번영에 큰 역할을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지지한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조갑제씨의 달란트 비유 해석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끌어다 쓰는 성경 해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고 싶은 말에 집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하고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힙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님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Again 1907?

지난 7월 8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를 새로운 부흥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와 노력이 전 한국 기독교를 망라해서 진행되었고, 그 노력의 정점에 이 행사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부흥이라는 대전제에 찬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올해 읽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흥을 추구하는 목적이 성도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있다면,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다면, 부흥의 당위성부터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행사는 열리고 있는 것이니… TV로 생중계되는 것을 봤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말씀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히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오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1-3)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말씀을 하기가 차마 힘든 모습이었다. 자신의 삶을 헌신적으로 드리고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을 알고 있기에 힘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선언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뭐 대단한 고백도 아닐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행위 없음으로 연결되는 기가막힌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값싼 선언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수많은 목사님들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변개시키는 것이었다는 고백이 있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질책이었고,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으며, 그것은 곧 나를 향한 질책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정말 아쉬운 것은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듣기 싫은 말씀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행사를 계획하면 그렇게 된다. 한시간은 회개하고 한시간은 용서를 선포하고, 그 이후에는 비전을 나누고… 뭐 대강 이런 식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철저해야 할 회개의 시간은 그저 잠시의 가슴아픔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나운서들에 의해 진행된 뒷 순서는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멘트로 치장되고 있었다.

단상에 올라와 말을 했던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철저한 회개,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에서 나타난 전인적이고 철저한 회개가 이번 집회에서 이루어졌는가? 물론 이 집회의 규모와 특성상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회는 그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에 ‘이랜드 기도실’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려 있는 댓글들… 기독교인들의 위선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했고, 그런 댓글들이 모두 높은 찬성을 받고 있었다. 최근에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볼 수 있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틀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고, 오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욕을 먹고 있었다.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면서, 삶 속에 어떻게 공의를 실천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아니 아예 그런 고민 자체를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지금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냉혹한 삶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흩어져서 고립되어 있다. 내가 느끼고 있는 무기력함은 아마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 대신 부동산 투자에 대한 책을 탐독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아득한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흥은 이런 철저한 무기력함의 고백에서 시작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내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더 깨져야 하고, 좀더 무너져야 한다. 내 생각과 방법이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무너지고, 더 많이 부서지는 것이다. 한 번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은, 1907년의 부흥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서 해석

어떤 의미에서든 성경만큼 많이 연구되고 있는 문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만큼 광범위하게 오해되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해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경 해석의 역사는 성경 오해의 역사다라고까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와 원칙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도 성경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서중석 교수님이 쓴 복음서 해석은 그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책이다. 사실 오래전에 서중석 교수님의 <청정한 빛>이라는 책을 읽고 꽤 자극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의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책 하면 의례히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씌여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뿐더러 요즘과 같은 광범위한 지식의 교환이 가능해진 것은 그야말로 몇십년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이 쓰여진 시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약의 텍스트는 모두 매우 한정되어 있는 소수의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책들이다. 복음서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들은 각각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공동체를 향하여 쓴 글들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큰 규모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비밀결사와 같이 매우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규명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아는 것이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네 개의 복음서가 각각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매우 한정된 소수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그것이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핵심 내용과 정신이 유지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그런 공통적인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그 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혼자 성경을 백번 읽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연구자의 연구 결과를 찾아서 읽는 편이 훨씬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혼자만의 독서는 자신의 세계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경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는 책이라면, 그리고 그 연구의 결과가 2천년동안 쌓여온 것이라면 그 방대한 연구의 결과 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해석이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

교회에서 이런 책에 있는 내용을 설교로 하기는 어렵다. 설교는 성경에 대한 연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기초적인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오해들을 살펴본다면, 교회에서도 성경을 학문적으로 가르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가 공동체, 누가 공동체, 마태 공동체, 그리고 요한 공동체의 성격에 대한 대체적인 파악을 할 수 있었고, 이런 공동체들이 비교적 작은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많은 대립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였다는데 약간 놀랐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어느 공동체이든지간에 이런 대립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기본이 되는 도그마들이 놀랍도록 유지되어 온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계속해서 바울 서신에 대한 연구 서적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genie 8951100227]

비밀은 없다

  1. 들어가는 글

    오마이뉴스에서 비밀은 쿰란동굴에 유폐되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쿰란이라는 책에 대한 일종의 소개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0년에 나왔으니 출판된지 꽤 된 책인데, 이런 기사를 통해 언급을 하는 것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이후로 이런 종류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오래 전에 이 쿰란이라는 책을 읽었고, 오래전부터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기사를 관심있게 읽어보았다.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였다라던가 하는 부분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게 내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대한 언급 부분은 사실 좀 토를 달지 않을 수 없다.

  2. 성전 논쟁

    예수는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논쟁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예수는 이미 에세네파의 관습에 따라 에세네파에 입문한 것이다. 그리고 논쟁에 필요한 교리와 성서지식들을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이야기는 복음서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말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매우 평범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공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 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좀더 제대로된 증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3. 제자들의 삶

    예수가 제자들을 맞아들이자, 제자들은 모두 직업을 버리고 맨 몸으로 예수를 따라온다. 이것 또한 속세의 직업을 버리고 공동재산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의 관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수는 부자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예수님의 생애를 금욕적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때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미지와 세례 요한의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겼고,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처럼 외양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은 쉽게 선지자로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처럼 평범한 사람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에게는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다닌 예수님의 모습은 역사적 예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도리어 견유철학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에세네파였다면 제자들을 이끌고 광야나 산으로 가서 숨어지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제도권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가설이 설득력이 없다.

  4. 40일의 금식

    예수는 유다사막에서 40일 동안 수행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40일 동안 예수가 살아남았던 것은, 바로 유다사막에서 은둔하고 있던 에세네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공백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40일의 금식 기간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 기간 동안 에세네파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가장 치열하게 전개될, 그리고 가장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삶의 여정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40일은 예수님에게 매우 가치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40일의 여정과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사투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5. 결론

    뉴스 기자의 글에 언급된 이야기만 하다보니 세 가지 이야기만 쓰고 말았다. 물론 더 할 말은 많이 있다. 굳이 결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진리는 단순하다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그럴듯한 이론을 찾아 헤맨다. 진실이 그렇게 간단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도 그랬고, 유행하고 있는 음모 이론도 그렇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말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굳이 오캄의 면도날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진실은 간단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거의 다 알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스스로 의도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 스스로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분의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복음서나 바울 서신과 같은 초기 저작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 위한 헛된 노력일 뿐이다.

도올의 신학논쟁

도올 김용옥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마도 최근에 발표된 그의 책인 기독교 성서의 이해, 그리고 요한복음 강해, 덧붙여서 그의 EBS 강의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학문적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도올의 이번 대상은 기독교인 셈이다.

내가 자주 가는 기독교 신문사 사이트인 뉴스앤조이에서도 이에 대한 논쟁이 한참이다. 그림에서처럼 홈페이지의 ‘신학마당’이라는 코너에서는 아예 도올과 관련된 기사만이 링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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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관련된 이전의 다른 논쟁들과 이번 도올 논쟁이 가장 다른 점은, 도올 논쟁이 EBS, 한겨레 신문, 오마이 뉴스 등 일반 언론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학 관련 논쟁은 기독교 관련 사이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도올이 가지고 있는 상품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쏟아내는 기독교 관련 이야기는 일반 언론에서 크게 보도가 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특징상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경우 댓글을 통해 나타나는 반응은 기독교에 대한 비방, 혹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를 한물간 어리석은 논리라고 공격하는 것이 쿨해보이는 분위기가 지금의 인터넷 상에서 감지되는 것이다. 도올이 제기하는 신학적 문제에 대한 토론들은 많이 볼 수 없지만, 그가 제기하는 한국 기독교의 현상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생산되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리라.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예컨대 재산, 교회 세습, 정치 세력화, 함량 미달의 목회자, 사학법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고, 그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반성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바란다), 최소한 신학의 문제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도올은 사실 정식으로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내가 그의 책들을 읽어보지 못했으니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다른 기사들을 통해 봤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구약 폐지론 정도로 이름지워지는 듯 하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여호와)가 애굽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는,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며,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

이 바탕에는 기독교 정경론, 그리고 역사적 예수 이해라는 문제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나로서는 그의 책을 읽지 않고, 그의 주장이 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한국 교회의 수준이 이 정도의 문제 제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화를 내야 하는 정도라면 그 자체가 문제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의 신학적 흐름 어쩌구 하는 말은 모르더라도,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되는 말씀들이 대부분 19세기 신학의 내용 조차도 포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볼 때, 어쩌면 깊이는 없이 외형적인 성장에만 주의를 기울여온 과거의 모습들이 이제 하나 둘씩 그 결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사실 성경에 대해 도올만큼만 공부하라는 말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경론은 뭐고 역사적 예수 이해는 뭔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독교인이 많을 것이다.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단순한 진리 만은 아니다. 그 단순함이 정말 단순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깊이있는 생각과 철학에서 나온 단순함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공부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 않고 외치는 단순함이란 단순함이 아니라 무지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무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독서에 대해 (1) – 빠르게 읽기

들어가는 말

독서를 하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일이기도 하다. 올해 들어서 지금까지 약 20권이 넘는 책을 읽었고, 각 책을 읽을 때마다 블로그에 그에 관한 글을 남겼다.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읽은 느낌과 생각에 대해 글을 남겨두는 것이 나중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올 한 해 동안 50권의 책을 읽겠다는 목표는 지금 책을 읽는 속도로 봐서는 상반기 내에도 충분히 달성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나 책을 읽지 않고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그동안의 독서 욕구가 갑자기 폭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빠르게 읽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빠르게 읽기>는 정해진 시간 내에 일정한 권수의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훨씬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내가 <빠르게 읽기>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것은 속독법 혹은 photo reading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속독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그냥 많이 읽다보면 남들과 좀 차이나게 빠르게 읽을 수 있게 된다. 비결같은거 없고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냥 빨리 읽을 뿐이다.)

<빠르게 읽기>의 장점

책의 가치를 빠르게 파악함

어렸을 때는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많이 읽기도 했거니와, 굉장히 빠르게 읽어냈었다. 책을 빨리 읽는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 무엇보다도 책을 빠르게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인 듯 하다. 빠르게 읽고 이 책이 과연 읽을만한 책인지를 알아볼 수 있고, 만약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빨리 포기할 수 있다. 이건 반드시 책의 내용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내게 맞는 내용인지, 혹은 지금 당장 필요한 내용인지 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그런 적이 많이 있지는 않지만, 빠르게 책을 읽다가 ‘아, 이 책은 잘못 선택했구나’ 하고 책을 덮어버린 기억이 꽤 있다.

책의 가치와 관련해서 빠르게 읽기의 가장 큰 효용성이라면 요즘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하고 요긴한 정보를 빠르게 선별해내는 능력에 있을 것이다. 갈수록 읽어야 할 것은 많아지고 그에 비례해서, 혹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쓸모없는 글도 많아진다. 출판이라는 것이 과거에 비해 점점 더 쉬워지고, 상업적인 성공이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그만큼 저자의 공을 들여서 만든 좋은 책을 찾기도 쉽지 않게 된다. 최근에는 베스트셀러라는 것도 책의 내용이나 가치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케팅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고, 각종 인터넷 서점의 서평마저도 이런 마케팅이라는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결국 책의 가치는 읽어보고 결정할 수 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좋은 책들이 선택되지 못할 수 있다. (책의 선택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더 정리하기로 하자)

책의 가치를 파악하기 위해 읽는 것은 당연히 정독이 아니라 속독이어야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책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능력이 배양되면 결국 인터넷 세계에 떠도는 (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엄청난 양의) 글들을 읽고 취사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더욱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동일 시간에 여러번 읽을 수 있음

속독의 또다른 장점은 내용의 철저한 이해를 위해서는 속독이든 정독이든 어차피 여러번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정독을 한다고 해서 내용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속독을 통해 책을 여러번 읽는 편이 천천히 정독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여러번 느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과서 같은 경우에도 교과서를 받자마자 두세번씩 읽어버리곤 했었다. 무슨 예습을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재미로 읽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몇 번을 읽고 나면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미리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선행학습을 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예습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책을 한참동안 많이 읽지 않으면서 책을 읽는 속도도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속독을 배워서 빠르게 읽은 것이 아니고 많이 읽으면서 연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빨라진 것이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지 않자 자연스럽게 속도도 느려진 것이었다. 이전에는 한 시간이면 한 권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는데, 올해 초에는 두 시간을 투자해야 한 권의 소설을 겨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속도가 느려지니 책을 읽으면서도 재미가 많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 느끼는 성취감을 아무래도 덜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요즘들어 책을 좀 많이 읽으면서 읽는 속도 역시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읽는 재미

책을 읽기로 결심을 했다고 해도 삶에는 항상 어떤 일인가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요즘은 내가 원하는만큼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책을 읽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휴대전화, 메신저, 온갖 종류의 방해꾼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누가 내 시간을 요구할지 예상할 수 없다. 책을 읽는 흐름이 자꾸 끊어지게 되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소한 한 두 번의 포기가 결국은 독서의 즐거움을 아예 막아버릴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마음을 먹었으면 끝까지 읽어내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

책을 빠르게 읽게 되면 예상하지 못한 다른 일로 인해 흐름이 끊어지는 경우가 적어지게 되고, 책을 전부 읽는 것이 좀더 쉬워질 수 있다. 한 권 한 권 정복해 나가는 것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잦은 성공이 쌓이는 것이 큰 성공의 지름길이다.

<빠르게 읽기>와 내용 파악

사실, 책을 빨리 읽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용 중에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책을 여러번 읽다보면 지난번에 읽을 때는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정독을 한다고 해서 책의 내용을 더욱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책에는 어떤 흐름이라는 것이 있는데, 너무 천천히 읽게 되면 결국 이 흐름을 놓치게 되고 내용의 앞뒤 관계를 잊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처음에 읽을 때는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 흐름을 이해하고, 두번째 세번째 읽으면서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세세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전체적인 흐름에 중요한 부분이라면 이미 첫번째 독서를 통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중에 발견하게 되는 내용이라는 것은 큰 흐름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부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 시간에 한 번 읽는 것보다 한 시간에 한번씩 세 번을 읽는 편이 거의 모든 경우에 내용의 이해에서도 더 우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 재미있는 책들은 수십번씩 읽기도 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들은 더욱 강화가 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들까지도 놓치지 않게 되는 경험을 해 봤다.

맺는 말

중고등학교 시절 영어공부를 할 때가 생각난다. 당시의 학력고사 체제에서는 영어 문제가 초반 몇 문제는 듣기, 이후 몇 문제는 단어, 강세, 이후 몇 문제는 문법, 그 이후에는 독해 뭐 이런 식으로 정해진 패턴으로 출제가 되었었다. 그래서 내가 어느 분야에 약한지를 알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영어 실력에 도움이 되는 방식은 아니지만.) 나는 독해 문제를 틀려본 경험이 거의 없다. 학력고사를 볼 때는 내가 읽었던 지문을 만나서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다. 독해 문제를 자꾸 틀리는 경우에 어떻게 하면 될까? 별로 생각나는 방법이 없다. 많은 교과서나 참고서에서는 그냥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다. 사실 독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어든 국어든 별다를게 없다. 기본적인 문법을 알고 있다면 독해를 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빠르게 읽기> 연습이 되어 있다면, 그래서 많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독해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을 것 같다.

덧붙이는 말 – 성경읽기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이라는 책이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일년에 몇 번 읽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큰 책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라는 책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빨리 읽을 때는 빨리 읽는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고, 느리게 읽을 때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느리게 읽기에 익숙하다. 보통 목사님들은 한 두 절의 성경구절을 가지고 설교를 하시기 때문이다. 강해설교 같으면 한 권의 성경을 몇 년씩 설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빨리 읽어보는 것이 참 중요하다. 빨리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큰 구조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면 어려운 개역 성경을 읽으려 하지 말고 공동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 혹은 쉬운 성경 같은 것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만약 복음서 한 권을 한두 시간 내에 읽어본다면, 복음서 전체를 덩어리로 읽는 것이 구절 구절에 집중하며 읽는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