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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목사님 설교 – 가슴이 아프다

오마이뉴스에서 ‘이명박 지지 금식기도’를 멈추십시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또 한 번 아득해 지는 마음…

설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어 금란교회 홈페이지에 가서 금주의 설교 내용을 확인해 봤다. 사실이다! 이 내용들은 모두 금란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설교 내용에서 그대로 긁어온 것이다.

금년 말 대선이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이요, 그 전이 한나라당의 경선 후보 결정하는 일입니다. 어쨌든 친공, 친북, 반미의 좌파가 다시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대선 < 한나라당 경선 후보 밖에 존재하지 않으니 무조건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이 되어야겠군. ‘친공 = 친북 = 반미 = 좌파’라는 어설픈 논리에 대해서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은 자본주의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단, 청지기사상을 가르쳤습니다. 자기만 위해서 재물을 땅에만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 의 뜻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 영원한 상급을 받는 길이며 땅에 축복의 씨앗을 심어서 자신과 후손들이 복 받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자본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그 근거라는 것이 기껏해야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모두 부자였다는 것이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이런 식으로 사례를 통해 증명을 하기에는 반례가 너무 많다.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성경 구절, 그리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김홍도 목사님은 뭐라고 대답을 하실까? 김홍도 목사님이 지지하고 있는 이명박 장로님이 자기만 위해서 재물을 땅에만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드리고 나눠주라는 것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시는걸까?

지금 우리는 붉은 용의 세력에 짓밟혀 처참하게 망하느냐, 사탄을 격파하고 승리하여 선교대국이 되어 축복을 받느냐의 기로에 달려 있습니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방식이 지겹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섬뜩하게 느껴진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킴노박”이 합세하여 이명박을 죽이려 한다고 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박근혜”가 합세하여 죽이기 작전을 편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회창씨 죽이듯 온갖 계략과 거짓으로 공격하고 때리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전 행자부장관도, 모 연예인도, 이제는 발 벗고 나서야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발표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가 교황을 뽑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흠집을 내려고 하 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흠집을 내려고 하는가 하는 이도 있습니다. 좌우간 “차떼기당”이거나 “부동산 투기”를 했던 간에 다시는 붉은 용의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합심하여 기도해야겠습니다.

대통령을 뽑는게 교황을 뽑는게 아니니 그냥 사소한건 넘어가자 뭐 그런 말인가보다. 차떼기를 했건 부동산 투기를 했건 상관없으니 무조건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뭐 이런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친북 좌파 세력은 이명박씨를 대선에 못 나오게 하고 다음에는 박근혜씨를 잡으려들 것입니다. 기왕이면 예수님 잘 믿는 장로가 되기를 기도해야겠고 아니면 박근혜씨라도 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주일 예배 설교 말씀으로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선관위에서는 쓸데없이 네티즌들 건드리지 말고 이런 분명한 선거법 위반에 대해 단속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러면 또 종교를 탄압한다고 난리가 나겠지.

내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김홍도 목사님이 믿는 예수님과 같은 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전혀 다른 분일거라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금란교회의 대예배에서 이런 설교가 선포되고 있다면 정말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천박한 논리로 설교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나 무시하는 것이다. 지난번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 대한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너무나 서글픔과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라고 외치는 조갑제씨나 김홍도 목사님이나 전혀 다를게 없다. 그저 자신의 목적만이 있을 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꾸 이런 것들이 눈에 보인다. 많이 기도하라는 말씀인거 같다. 정말 금식이라도 선포하고 기도를 해야 할 것 같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

조갑제 닷컴에 왜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가라는 글이 실렸다. 글을 쓴 목적은 결국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두둔하고 보호하는데 있는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요새 유행하는 도덕성 검증은 게으른 좌파들이 만든 것인데, 무능한 자를 도덕군자, 유능하여 일을 많이 하다가 실수도 조금한 이를 부패분자로 몰려는 함정이다. 이 함정에 빠진 것이 한나라당이다.

결국 ‘유능하여 일을 많이 하다가 실수도 조금한 이’가 이명박씨라는 것이고, 검증으로부터 자유로운 깨끗한 후보가 있다면 그는 ‘무능한 자’가 되는 것이다. 참으로 편리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논평할 가치조차 없겠지만, 그 주장의 논거로 들고 있는 긴 분량의 전반부가 눈길을 끌었다. 마태복음 25장 14절부터 25절(Mat 25:14-25 KOR)까지 나오는 이른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동일한 텍스트를 보고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단락의 이야기가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에 중심을 두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앞뒤의 문맥이나 이 비유가 나온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목적은 ‘언제 올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준비해야 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이 단락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은 밝히더라도, 세부적으로 조갑제씨가 말한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언급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것은 어쨌든 이야기의 세부 내용을 통해 나타나는 작은 부분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조갑제씨의 성경 해석이 잘못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있다. 즉, ‘주인=하나님=예수님, 종=인간’이라는 등식에 맞추어놓고 해석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알레고리적 해석이 드문 일은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는 아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으며, 일부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 적용에 있어서 엄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갑제씨는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몰라도, 성경에서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가 되어 있다. 그것이 공동체의 단합을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희년의 법칙은 분명히 자본주의적 사상을 근본적으로 배척하는 것이다. 50년이 지나면 모든 종 된 사람을 풀어주어야 하고, 부득이하게 땅을 판 사람이 있으면 그 땅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희년에 해야 할 일이다. 이건 매수자의 권리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제도의 이면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찾아볼 수 있다. 최소한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개인주의적 번영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비전이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의 주인과 하나님을 등치시키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달란트=재능’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야기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주인과 셈을 해야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에 의해 이후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 최소한 내 해석으로는 그렇다.

조갑제씨의 말처럼 근대 자본주의가 청교도의 사상적 뒷받침을 받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실, 근면, 절제, 검소 등의 청교도적인 가치관과 자본주의의 결합이 유럽 세계의 번영에 큰 역할을 한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지지한다고 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조갑제씨의 달란트 비유 해석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끌어다 쓰는 성경 해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고 싶은 말에 집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하고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힙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님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Again 1907?

지난 7월 8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를 새로운 부흥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와 노력이 전 한국 기독교를 망라해서 진행되었고, 그 노력의 정점에 이 행사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부흥이라는 대전제에 찬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올해 읽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흥을 추구하는 목적이 성도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있다면,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다면, 부흥의 당위성부터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행사는 열리고 있는 것이니… TV로 생중계되는 것을 봤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말씀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히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오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1-3)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말씀을 하기가 차마 힘든 모습이었다. 자신의 삶을 헌신적으로 드리고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을 알고 있기에 힘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선언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뭐 대단한 고백도 아닐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행위 없음으로 연결되는 기가막힌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값싼 선언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수많은 목사님들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변개시키는 것이었다는 고백이 있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질책이었고,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으며, 그것은 곧 나를 향한 질책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정말 아쉬운 것은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듣기 싫은 말씀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행사를 계획하면 그렇게 된다. 한시간은 회개하고 한시간은 용서를 선포하고, 그 이후에는 비전을 나누고… 뭐 대강 이런 식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철저해야 할 회개의 시간은 그저 잠시의 가슴아픔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나운서들에 의해 진행된 뒷 순서는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멘트로 치장되고 있었다.

단상에 올라와 말을 했던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철저한 회개,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에서 나타난 전인적이고 철저한 회개가 이번 집회에서 이루어졌는가? 물론 이 집회의 규모와 특성상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회는 그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에 ‘이랜드 기도실’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려 있는 댓글들… 기독교인들의 위선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했고, 그런 댓글들이 모두 높은 찬성을 받고 있었다. 최근에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볼 수 있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틀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고, 오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욕을 먹고 있었다.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면서, 삶 속에 어떻게 공의를 실천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아니 아예 그런 고민 자체를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지금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냉혹한 삶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흩어져서 고립되어 있다. 내가 느끼고 있는 무기력함은 아마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 대신 부동산 투자에 대한 책을 탐독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아득한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흥은 이런 철저한 무기력함의 고백에서 시작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내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더 깨져야 하고, 좀더 무너져야 한다. 내 생각과 방법이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무너지고, 더 많이 부서지는 것이다. 한 번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은, 1907년의 부흥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서 해석

어떤 의미에서든 성경만큼 많이 연구되고 있는 문헌이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만큼 광범위하게 오해되고 있는 책도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해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성경 해석의 역사는 성경 오해의 역사다라고까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와 원칙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도 성경을 제대로 읽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서중석 교수님이 쓴 복음서 해석은 그래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은 책이다. 사실 오래전에 서중석 교수님의 <청정한 빛>이라는 책을 읽고 꽤 자극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 중의 가장 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대인들은 책 하면 의례히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씌여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금속활자의 혜택을 받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닐뿐더러 요즘과 같은 광범위한 지식의 교환이 가능해진 것은 그야말로 몇십년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경이 쓰여진 시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성경이 쓰여진 시대의 책이라고 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약의 텍스트는 모두 매우 한정되어 있는 소수의 공동체를 위해 쓰여진 책들이다. 복음서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그것들은 각각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공동체를 향하여 쓴 글들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큰 규모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비밀결사와 같이 매우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규명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아는 것이 그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네 개의 복음서가 각각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독창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매우 한정된 소수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그것이 성경을 오해하게 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요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시대의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 핵심 내용과 정신이 유지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그런 공통적인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그 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그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혼자 성경을 백번 읽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연구자의 연구 결과를 찾아서 읽는 편이 훨씬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혼자만의 독서는 자신의 세계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경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있는 책이라면, 그리고 그 연구의 결과가 2천년동안 쌓여온 것이라면 그 방대한 연구의 결과 속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해석이 들어있을 확률이 높다.

교회에서 이런 책에 있는 내용을 설교로 하기는 어렵다. 설교는 성경에 대한 연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기초적인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수많은 오해들을 살펴본다면, 교회에서도 성경을 학문적으로 가르치려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가 공동체, 누가 공동체, 마태 공동체, 그리고 요한 공동체의 성격에 대한 대체적인 파악을 할 수 있었고, 이런 공동체들이 비교적 작은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많은 대립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였다는데 약간 놀랐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어느 공동체이든지간에 이런 대립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기본이 되는 도그마들이 놀랍도록 유지되어 온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계속해서 바울 서신에 대한 연구 서적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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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1. 들어가는 글

    오마이뉴스에서 비밀은 쿰란동굴에 유폐되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쿰란이라는 책에 대한 일종의 소개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0년에 나왔으니 출판된지 꽤 된 책인데, 이런 기사를 통해 언급을 하는 것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이후로 이런 종류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오래 전에 이 쿰란이라는 책을 읽었고, 오래전부터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기사를 관심있게 읽어보았다.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였다라던가 하는 부분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게 내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대한 언급 부분은 사실 좀 토를 달지 않을 수 없다.

  2. 성전 논쟁

    예수는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논쟁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예수는 이미 에세네파의 관습에 따라 에세네파에 입문한 것이다. 그리고 논쟁에 필요한 교리와 성서지식들을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이야기는 복음서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말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매우 평범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공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 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좀더 제대로된 증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3. 제자들의 삶

    예수가 제자들을 맞아들이자, 제자들은 모두 직업을 버리고 맨 몸으로 예수를 따라온다. 이것 또한 속세의 직업을 버리고 공동재산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의 관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수는 부자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예수님의 생애를 금욕적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때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미지와 세례 요한의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겼고,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처럼 외양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은 쉽게 선지자로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처럼 평범한 사람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에게는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다닌 예수님의 모습은 역사적 예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도리어 견유철학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에세네파였다면 제자들을 이끌고 광야나 산으로 가서 숨어지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제도권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가설이 설득력이 없다.

  4. 40일의 금식

    예수는 유다사막에서 40일 동안 수행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40일 동안 예수가 살아남았던 것은, 바로 유다사막에서 은둔하고 있던 에세네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공백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40일의 금식 기간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 기간 동안 에세네파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가장 치열하게 전개될, 그리고 가장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삶의 여정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40일은 예수님에게 매우 가치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40일의 여정과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사투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5. 결론

    뉴스 기자의 글에 언급된 이야기만 하다보니 세 가지 이야기만 쓰고 말았다. 물론 더 할 말은 많이 있다. 굳이 결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진리는 단순하다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그럴듯한 이론을 찾아 헤맨다. 진실이 그렇게 간단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도 그랬고, 유행하고 있는 음모 이론도 그렇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말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굳이 오캄의 면도날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진실은 간단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거의 다 알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스스로 의도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 스스로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분의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복음서나 바울 서신과 같은 초기 저작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 위한 헛된 노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