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없다

  1. 들어가는 글

    오마이뉴스에서 비밀은 쿰란동굴에 유폐되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이미 읽은 적이 있는 쿰란이라는 책에 대한 일종의 소개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0년에 나왔으니 출판된지 꽤 된 책인데, 이런 기사를 통해 언급을 하는 것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이후로 이런 종류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오래 전에 이 쿰란이라는 책을 읽었고, 오래전부터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터라 기사를 관심있게 읽어보았다.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였다라던가 하는 부분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고, 그게 내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대한 언급 부분은 사실 좀 토를 달지 않을 수 없다.

  2. 성전 논쟁

    예수는 12살 때 성전에서 학자들과 논쟁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당시 예수는 이미 에세네파의 관습에 따라 에세네파에 입문한 것이다. 그리고 논쟁에 필요한 교리와 성서지식들을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이야기는 복음서에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 말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매우 평범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상상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공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 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좀더 제대로된 증거를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3. 제자들의 삶

    예수가 제자들을 맞아들이자, 제자들은 모두 직업을 버리고 맨 몸으로 예수를 따라온다. 이것 또한 속세의 직업을 버리고 공동재산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의 관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예수는 부자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흔히 예수님의 생애를 금욕적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때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이미지와 세례 요한의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즐겼고, 존 도미니크 크로산의 역사적 예수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처럼 외양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사람은 쉽게 선지자로 받아들이지만, 예수님처럼 평범한 사람은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특별한 사람에게는 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을 이끌고 다닌 예수님의 모습은 역사적 예수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도리어 견유철학자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에세네파였다면 제자들을 이끌고 광야나 산으로 가서 숨어지냈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제도권 유대교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가설이 설득력이 없다.

  4. 40일의 금식

    예수는 유다사막에서 40일 동안 수행을 했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40일 동안 예수가 살아남았던 것은, 바로 유다사막에서 은둔하고 있던 에세네파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공백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 40일의 금식 기간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이 기간 동안 에세네파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다. 가장 치열하게 전개될, 그리고 가장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삶의 여정을 준비하는 기간으로서 40일은 예수님에게 매우 가치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 40일의 여정과 얍복강가에서의 야곱의 사투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5. 결론

    뉴스 기자의 글에 언급된 이야기만 하다보니 세 가지 이야기만 쓰고 말았다. 물론 더 할 말은 많이 있다. 굳이 결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진리는 단순하다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한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그럴듯한 이론을 찾아 헤맨다. 진실이 그렇게 간단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도 그랬고, 유행하고 있는 음모 이론도 그렇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말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굳이 오캄의 면도날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진실은 간단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미 거의 다 알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스스로 의도한 것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님의 죽음이 예수님 스스로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분의 삶을 설명하고 이해하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복음서나 바울 서신과 같은 초기 저작들의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기 위한 헛된 노력일 뿐이다.

도올의 신학논쟁

도올 김용옥이 요즘 화제가 되고 있다. 아마도 최근에 발표된 그의 책인 기독교 성서의 이해, 그리고 요한복음 강해, 덧붙여서 그의 EBS 강의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학문적 배경만큼이나 다양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도올의 이번 대상은 기독교인 셈이다.

내가 자주 가는 기독교 신문사 사이트인 뉴스앤조이에서도 이에 대한 논쟁이 한참이다. 그림에서처럼 홈페이지의 ‘신학마당’이라는 코너에서는 아예 도올과 관련된 기사만이 링크되어 있다.

dool

신학과 관련된 이전의 다른 논쟁들과 이번 도올 논쟁이 가장 다른 점은, 도올 논쟁이 EBS, 한겨레 신문, 오마이 뉴스 등 일반 언론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학 관련 논쟁은 기독교 관련 사이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도올이 가지고 있는 상품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쏟아내는 기독교 관련 이야기는 일반 언론에서 크게 보도가 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특징상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이런 기사가 나오는 경우 댓글을 통해 나타나는 반응은 기독교에 대한 비방, 혹은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를 한물간 어리석은 논리라고 공격하는 것이 쿨해보이는 분위기가 지금의 인터넷 상에서 감지되는 것이다. 도올이 제기하는 신학적 문제에 대한 토론들은 많이 볼 수 없지만, 그가 제기하는 한국 기독교의 현상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생산되는 것도 그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리라.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 예컨대 재산, 교회 세습, 정치 세력화, 함량 미달의 목회자, 사학법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고, 그를 통해서 한국 교회가 반성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바란다), 최소한 신학의 문제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도올은 사실 정식으로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내가 그의 책들을 읽어보지 못했으니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다른 기사들을 통해 봤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구약 폐지론 정도로 이름지워지는 듯 하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의 민족신인 야훼(여호와)가 애굽의 식민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겠다는,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며, 예수의 출현으로 새로운 계약(신약)이 성립된 만큼 구약은 당연히 효력이 없다

이 바탕에는 기독교 정경론, 그리고 역사적 예수 이해라는 문제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나로서는 그의 책을 읽지 않고, 그의 주장이 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어떤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한국 교회의 수준이 이 정도의 문제 제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화를 내야 하는 정도라면 그 자체가 문제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의 신학적 흐름 어쩌구 하는 말은 모르더라도,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되는 말씀들이 대부분 19세기 신학의 내용 조차도 포용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볼 때, 어쩌면 깊이는 없이 외형적인 성장에만 주의를 기울여온 과거의 모습들이 이제 하나 둘씩 그 결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사실 성경에 대해 도올만큼만 공부하라는 말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경론은 뭐고 역사적 예수 이해는 뭔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기독교인이 많을 것이다.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단순한 진리 만은 아니다. 그 단순함이 정말 단순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다. 깊이있는 생각과 철학에서 나온 단순함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공부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 않고 외치는 단순함이란 단순함이 아니라 무지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무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