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폭력

성폭력에 대한 팟캐스트를 들었다. 꼭 이 내용 때문은 아니지만,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폭력에 대한 생각을 한 번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성폭력이 큰 문제가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보다는 폭력에 좀더 초점을 맞추어야만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적 의미의 폭력이라는 것은 강자가 약자를, 그리고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다루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있는 글을 쓸만큼의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고, 다만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펴봄으로서 폭력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에 대한 성찰을 해 보고자 한다.

성경(혹은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다른 책들)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언뜻 보기에) 상호 모순적인 내용이 많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지엽적인 해석보다는 전반적인 기본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선, 구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율법에 나타난 특징들을 볼 필요가 있겠다. 출애굽기 22장 21~13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

이 글에서 이방 나그네, 과부, 고아는 모두 사회적 약자를 표현하고 있는 말로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공동체의 임무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으며, 신명기 14장, 16장, 24장, 27장 등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이 때 이 선언들의 이유로 너희도 이집트에서 나그네였다라는 말이 제시되고 있다. 즉, 누구나 약자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강자의 위치에 있을 때 약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경험은 그들에게 있어 전 공동체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하는 기억이었으며, 그 기억을 되살림으로서 자신의 공동체 안에 그런 억압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타락을 경고했던 선지자들에게서도 이러한 의식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선포했던 이사야는 이런 점을 너무나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1:16-17)

예레미야 22장 3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그리고 말라기 3장 5절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에 이르기까지 이런 논리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는 일,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일, 사람을 학대하는 일, 노동자의 임금을 속이거나 억울하게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분명하게 심판하시는 범죄 행위이다. 이런 행위들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보면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히 읽을 수 있다. 그는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의 친구를 자처했으며,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변호하였다. 그는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정황상 그가 고친 많은 병자들은 사회적으로 억압받거나 배척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전혀 대접을 받고 있지 못하던 어린이들을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준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도 예수님의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낸 이야기는 바로 선한 사마리안인의 비유라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인은 유태인들에게는 상종할 수 없는 더러운 족속으로 대우받던 사람들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레위인, 제사장 등과 비교한 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이었으며, 좋은 이웃에 대한 통념을 가장 극적으로 깨버린 이야기였다. 지금 시대의 언어로 이야기한다면, 보수 기독교인들이 가장 터부시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성적 소수자인 동성애자를 동일한 위치에 넣는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한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목사보다 동성애자가 더 좋은 이웃이다라는 선언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결국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하나님은 약자를 편애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며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다수결의 원칙 조차도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는 합법적인 도구로 사용될 때는 무서운 폭력이 될 수 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다면 분명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의 편이 되실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보면, 보수 기독교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로, 힘의 논리가 더욱 횡행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것이 소수를 억누를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힘의 논리가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자라난 청소년들이 강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힘의 논리가 통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 특히 그 속에서 약자의 친구가 아닌 강자의 친구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라는 준엄한 심판의 소리를 피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수많은 폭력 앞에서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아니 가해자의 편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언제 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피눈물을 흘리게 될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정의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면서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

아프간 사태와 폭력

이번 아프간 피랍 사태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관대한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1. 절대적인 고찰

누구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배타적이며, 종교 없음 역시 매우 배타적인 종교의 하나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믿음을 기반에 두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믿음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개체적인 믿음의 다름도 중요하지만 그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정경, 신앙적 전통, 사제 등은 이런 일반화의 가장 중요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소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일반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동일한 텍스트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 같은 경우에 같은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정도의 차이에 대해서 끊임없는 의견 교환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나가는 것 뿐이다.

선교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모든 종교에게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선교에 대한 열망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아 그 배경에 이기적인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역시나 선교라는 부분을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믿음의 충돌, 그리고 이를 조정하기 위한 합의는 모든 개인간, 모든 (개인들로 이루어진 모든 수준의) 단체 간에 필수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보면, 아프간 사태의 핵심에는 이런 가치관의 충돌이 자리잡고 있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합의 과정에 폭력의 요소가 개입했다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폭력에 대한 생각 역시 사람에 따라 용인하는 범위가 달라질 것이다. 모든 폭력이 나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는 더욱 넓은 범위에서 폭력을 용인하고 있다. 그래도 최소한 이번 아프간 사태에서 탈레반의 폭력은 거의 모든 사람이 용인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러 있다고 볼 수 있다.

2. 현실적인 고찰

아프간 인질들, 그리고 그들을 아프간에 파송했던 샘물교회에 가해진, 그리고 가해지고 있는 모든 비난들을 자세히 보면, 이 비난이 단지 그들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 교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아프간 인질들과 샘물교회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을 포함하는 훨씬 더 넓은 범위의 한국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한국 교회를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폭력의 피해자였다는 피해 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 역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전도자를 향한 비난 뒤에는, 그들이 이 말을 들으면서 느낀 폭력성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믿는 것이 무조건 최고이고, 그걸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소리지르는 행위’를 폭력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 시절에 학교에서 성 문화제 비슷한 행사가 열린 적이 있었다. 행사의 일환으로 중앙도서관 앞에 큰 조형물이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각종 포르노성 매체, 인쇄물 등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 조형물로 인해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생들 간의 열띤 토론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한 학생이 이런 요지의 말을 했었다. "이런 조형물을 세움으로서, 원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이 조형물을 보도록 강요당한다면, 그것은 그들에 대한 명백한 폭력이다." 나도 매우 공감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있는 권리만큼이나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을 수 있는 권리 역시 중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할 수 있는 권리에 비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더욱 본질적으로 중요한 권리인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원치 않는 어떤 일을 당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명백한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최근에 많이 논의되고 있는 성희롱, 성 폭력에 대한 논의도 이런 점에서 생각을 해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포교 행위로 인해 원치 않는 말을 듣거나 하는 경우에 이것을 폭력이라고 느끼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고찰한대로, 모든 사람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밖에 없다. 따라서, 크던 작던 사람들의 생각이 충돌하는 현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런 폭력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하고, 현대 사회에 있어서는 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즉, 모든 가치관의 충돌은 법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문제 없는 일이라면 일단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하철 전도자의 시끄럽고 폭력적인 말 역시 그들이 법을 어기지 않는 한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으며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 지하철 역에서의 목탁 소리, 혹은 좋은 음악 소리라고 하더라도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심리적으로 피해를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단지 그렇게 당했다고 느끼는 폭력 때문에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그 이면에는 평소에 교회가 보여준 몰인정함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교회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고집스런, 그리고 이기적인 존재로 비추어져 왔는지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지금까지 보여준 이기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피랍자들을 향한 일반 대중들의 비난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그 논의의 줌심에 이른바 ‘국익’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는데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존중해 주는 것이 민주주의의 개념이라고 한다면, 개념이 모호한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매도할 수 있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결코 용인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다수가 모든 종류의 소수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억누르는 폭력이다. ‘다르다’와 ‘틀리다’가 혼용되는 언어적인 현상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르다’를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다수가 소수를 향하여 보여주는 억압과 폭력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이런 억압과 폭력은 스스로가 다수에 속해있음을 인지하게 해 주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전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의 ‘디 워 논쟁’이나 ‘아프간 피랍자 사태’ 모두가 많은 사람들이 (특히 네티즌들이) 얼마나 다수에 속하고 싶어하는가, 그리고 그 다수에 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안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차별,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차별 등 우리 사회에서 근간에 문제가 되어온 많은 사회 현상들이 바로 이런 ‘다수에 의한 소수에 대한 억압, 폭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아프간 피랍자에 대한 사회적인 폭력은 이런 현상 중에서, 지금까지는 이른바 다수에 속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최소한 소수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기독교라는 대상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전까지의 현상과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기독교는 자신이 어떻게 대중으로부터의 지지를 잃고 소수자의 위치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다. 잠시 선교의 방향을 바꾼다거나 자숙하는 정도의 행동으로 이런 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더욱더 큰 교만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