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30.05.2007 1 Comment

    장정일의 공부는 그 내용적인 면에서도 많은 생각할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가 취하고 있는 독서법 역시 내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약 30여권의 책들은 아무리 봐도 그 목록에서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책을 고르고 닥치는대로 읽어나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목록이다. 그래서 어쭙지 않은 자기 개발 관련 도서에서부터 신앙 서적, 그리고 소설, 시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장정일은 그렇게 책을 읽는 것 같지 않다.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읽어서일수도 있지만, 그는 동일한 주제 혹은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몇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내는 식의 독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독서의 장점은 그가 적고 있는 독후감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여러 상이한 시각을 통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공부에 대한 정의와 일통하는 것인데, 민주주의가 의견와 의견의 부딪힘이고, 그런 의견의 교환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독서법을 통해 진정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이 무슨 거창한 방법은 아니다. 내가 연구를 할 때에도 어떤 종류의 일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연구 주제와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모으고, 그 논문들을 읽고 정리하면서 주제에 대한 배경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의 가치와 특수성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 연구 과정에서 후회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연구 분야에서는 항상 이런 공부 방법을 적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공 분야의 연구가 아닌 교양을 위한 책읽기에서는 이런 방법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기본적인 책읽기의 넓이가 너무 좁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깊게 읽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넓이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기본은 있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대학생이 읽어야 할 교양도서 100선> 따위의 추천 목록에 있는 책 중에서 절반도 읽어내지 못한 내 상황에서는 넓게 읽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박사라는 것은 박학다식한 선비라는 뜻일진대 배움의 넓이가 넓은 사람이라는 뚯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매우 한정된 분야에서 조금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책읽기에 있어서 (혹은 교양에 있어서) 충분한 정도의 넓이라는 것은 참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이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종합적인 인간형을 추구하는 것은 지금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일하고 있는 좁은 분야에서 충분히 깊게 읽는 것도 너무나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넓이와 깊이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장정일의 책읽기 전략을 따라서 한 주제에 관해 최소한 서너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방법을 쓴다고 하면 어떤 주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걸까? 나와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항상 인문학자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푸코, 데리다 같은 사회학자들에 대해 읽어야 하는걸까? 아니면 정치? 혹은 경제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할까?

    결국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읽느냐의 문제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 한 때, <역사적 예수>라는 주제에 심취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책들을 구할 수 있는대로 구해서 읽었던 때가 있다. 이 때의 책읽기는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나서 그 영향으로 시작이 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거나 충격을 받은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책읽기를 깊이있게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예수의 생애>만큼 내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것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때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추’를 읽고 에코의 글쓰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온 그의 장편소설들을 (바우돌리노까지) 다 구입을 해서 읽었다.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어느 것 하나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엄청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지적 유희를 즐기는 그의 소설이 나름대로 지식에 대한 내 갈증을 자극하는 것을 즐기면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사람인 에코가 중세 유럽의 역사에 해박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것이고, 내가 중세 유럽의 역사를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내가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도 된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구입하면서 집어넣은 책이 다산 정약용에 대한 책이었다.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는 것도 가능해지면 좋겠지만.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초점이 없는 글이 된 것 같지만, 최소한 내가 2007년 초부터 지금까지 해온 책읽기의 방식이 너무나 중구난방 일관성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해 보고, 앞으로는 교양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연구와 생각에 의해 독서 목록을 정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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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의 공부

    지난번에 장충동 김씨의 책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 책의 저자와 최근 작가들의 질투어린 선망의 대상인 장정일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구입했다. 제목도 참 잘 지었다. 공부!

    아직 책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책의 뒤표지에 나와있는 저자의 공부에 대한 정의, 그리고 한 두 편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우선 장정일의 공부의 정의.

    > 공부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무엇보다 개념과 논리를 서로 이해하고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모르면 남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서로 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내가 평소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교양을 쌓는 일이라는 말과 바꾸어 써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으려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교양을 쌓기 위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공부다. 내가 중학생 때, 교양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내 인생의 목표 중 한 가지로 정한 일이 있다. 그리고 그 교양이라는 것의 정의를 나름대로 내려보았었고,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도 그 정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 주체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

    내가 정의한 교양은 생각과 판단의 기준이 외부에 있어 사안에 따라 외부의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변화하는 불안정한 단계를 벗어나서, 스스로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장정일은 달랐다 그는 이미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서로 이해하고 있는 단계를 상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이후에서야 그 차이를 인정하든 아니면 내 견해를 수정하든, 혹은 상대방을 설득하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장정일의 교양은 스스로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그 견해의 요지를 파악하여 스스로의 견해와 비판적으로 대조하는, 그리고 그 자양분을 흡수하는데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교양에 대한 정의 자체가 다르면, 당연히 교양을 쌓기 위해 하는 노력에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문제의 정의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달려 있다. 많은 경우에 적절한 질문은 적절한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장정일의 공부 방법은 내 공부 방법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장정일의 공부 방법이라는 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 책이 장정일의 독후감 모음이라는 점이 1년에 50권 책 읽기를 하고 있는 내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서 글을 써 볼 예정이다)

    교양의 정의를 스스로 바꾼다고 하는 것은, 내 삶의 중요한 목표 하나를 수정한다는 것이고 그런만큼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러나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가지 않는 것은 비겁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 삶은 정체된 삶이라고 생각하기에 어쩔 수가 없다. 최소한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거기에 덧붙여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이해하고 그 견해와 내 견해의 차이점을 분석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교양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내가 바로 교양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닐 것이다. 그저 (강명식의 <십년 후엔>이라는 노래에서 말하듯이) 그 때까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십년을 하루 같이 황소 걸음으로 걸어간다면 그 곳에 더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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