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행 (2) 워싱턴, 필라델피아

워싱턴을 짧은 시간에, 그것도 오전부터 오후 3시까지 정도의 시간에 제대로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나마 유명한 장소들의 사진만이라도 찍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을 해야 할 것이다.

Best Western Fairfax 호텔에서 일하고 있던 Sanaa Hameed와 나눈 대화는 그런 면에서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그녀의 이름과 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을 정도니까. 나중에 이메일을 통해 고맙다는 인사 표현을 한 번 더 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내 계획은 여러 종류의 DC 관광 프로그램 중에서 하나를 추천받는 것이었다. 트롤리라던가 이층버스라던가 그런걸 이용해서 유명한 장소를 도는 프로그램들이 꽤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에 적당한 것 하나를 골라서 이용을 하려고 했고, 그런 취지로 Sanna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게 지하철 one day pass를 사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관광을 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대번에 관광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런 관광 프로그램이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나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 $25 정도 하는 프로그램들에 비해 $6.95만으로 해결되는 자유 여행이니 여러 면에서 이득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지하철을 타야 DC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름대로는 링컨 기념관부터 보고, 백악관과 여러 박물관들을 차례로 본 후에 3시 30분 정도까지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면 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버스 출발이 4시 45분이었는데, 한 시간 전까지는 도착해서 표를 끊어야 한다는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런 계획은 조지 워싱턴 대학 역에서 내려서 링컨 기념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역에서 너무 멀었다는거. 게다가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백팩과 수트케이스를 모두 가지고 움직여야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워싱턴의 날씨는 최고 기온이 31도에 달했다. 더운 날씨에 짐을 잔뜩 지고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한 손에는 물병을 들고 움직여야 했으니 상황은 가히 최악이라고 말할만했다.

그래도 처음부터 좌절할 수는 없는거니까, 일단 링컨 기념관까지는 갔다. 정말 대단한 장관이었다. 마음 편하게, 그리고 몸도 편하게 구경을 했다면 정말 좋은 구경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걸어온 거리와 앞으로 걸어야 할 거리를 생각해보니, 편하게 어슬렁거릴 시간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꾸 발걸음을 재촉하다보니 깊이있게 생각하고 반추할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어쨌든, 링컨 기념관에 이어 한국전 참전 용사 기념 공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내가 갔을 때는 한국인인 듯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모두들 숙연한 모습이었고, 나 역시 이 때만큼은 숙연하게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었다.

눈 앞에 워싱턴 마뉴먼트의 모습이 보인다. 짐을 지고 걸어가기에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걸었다. 음모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프리메이슨의 이야기 생각이 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저렇게 거대하면서도 특이하게 생긴 건물이 워싱턴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 자체가 뭔가 그 뒤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도널드 레이건 기념 빌딩에 들어갈 때는 마치 공항에서처럼 짐 검사를 철저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미국이 얼마나 테러에 대해 민감해졌는지를 전에는 잘 못 느꼈었는데, 지하에 있는 식당가에 밥 먹으러 들어가는 사람들의 짐을 다 검사하는 모습에서 그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백악관도 멀리서 봤고, 워싱턴 시내도 그럭저럭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러 박물관들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는 것은 참 아쉬운 일이었다. 필라델피아로 가는 버스를 예약해 놓은 터라 유니언 스테이션 근처에 있다는 버스 터미널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단 잘 모르는 길인데다가 걸어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조금 여유를 가지고 터미널로 이동했다.

일단, 워싱턴의 유니언 스테이션 근처는 무서운 느낌이 든다. 만약 저녁때였으면 그렇게 걸어다니지 못했을 것 같다. 게다가 그레이하운드 버스 터미널은 그런 길을 한참 더 걸어야 나오는데, 터미널 안의 분위기는 유니언 스테이션과도 사뭇 다르다. 우선 거의 흑인들만 볼 수 있는데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깨끗하고 좋은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자가용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속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생활수준이 낮은 편일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여간 지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터미널을 다시 나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터미널 내에서 시간을 보냈다.

버스는 볼티모어에서 쉬면서 승객들을 더 태웠다. 필라델피아에 도착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세 시간 40분 정도였다.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홈구장으로 쓰이는 야구장은 거대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다. 주차장이 더 거대해 보이기는 했지만.

필라델피아의 고속버스 터미널은 워싱턴보다는 좀 낫지만 그래도 좀 무섭긴 했다. 더군다나 늦은 저녁에 도착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 있다. 그래도 시내에 걸어다는 사람이 워낙 많았던 터라 길거리가 무서워보이지는 않았다.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면서 발걸음을 빨리할 수 밖에 없었다.

클럽 쿼터스 필라델피아 호텔은 호텔 예약 사이트들의 평가를 종합해 보면 가격대비 서비스가 좋은 편이라는 평이 있었고, 방이 좀 좁은 것이 단점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정말 방이 작았다. 피곤한 하루였던터라 한국으로 전화를 하고 짐을 간단하게 정리하고는 잠이 들었다. 창을 때리는 빗줄기 소리를 들으면서 필라델피아에서의 첫날이 저물었다.

Again 1907?

지난 7월 8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를 새로운 부흥의 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와 노력이 전 한국 기독교를 망라해서 진행되었고, 그 노력의 정점에 이 행사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부흥이라는 대전제에 찬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나 전개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올해 읽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에 대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흥을 추구하는 목적이 성도의 수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있다면,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에 있지 않다면, 부흥의 당위성부터 의심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행사는 열리고 있는 것이니… TV로 생중계되는 것을 봤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셨다.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말씀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히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오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1-3)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말씀을 하기가 차마 힘든 모습이었다. 자신의 삶을 헌신적으로 드리고 있는 살아있는 성도들을 알고 있기에 힘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가 실상은 죽어있다라는 선언이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뭐 대단한 고백도 아닐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행위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행위 없음으로 연결되는 기가막힌 현실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을 값싼 선언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수많은 목사님들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복음을 변개시키는 것이었다는 고백이 있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질책이었고,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으며, 그것은 곧 나를 향한 질책이었다. 눈물이 나왔다.

그렇지만 정말 아쉬운 것은 옥한흠 목사님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듣기 싫은 말씀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행사를 계획하면 그렇게 된다. 한시간은 회개하고 한시간은 용서를 선포하고, 그 이후에는 비전을 나누고… 뭐 대강 이런 식이다. 그래서 철저하고 철저해야 할 회개의 시간은 그저 잠시의 가슴아픔으로 끝나고 말았다. 아나운서들에 의해 진행된 뒷 순서는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멘트로 치장되고 있었다.

단상에 올라와 말을 했던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철저한 회개, 원산대부흥과 평양대부흥에서 나타난 전인적이고 철저한 회개가 이번 집회에서 이루어졌는가? 물론 이 집회의 규모와 특성상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집회는 그저 하나의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 아침에 ‘이랜드 기도실’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달려 있는 댓글들… 기독교인들의 위선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했고, 그런 댓글들이 모두 높은 찬성을 받고 있었다. 최근에 기독교와 관련된 뉴스가 나올 때마다 볼 수 있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틀전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 집회가 열렸고, 오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욕을 먹고 있었다. 입으로만 믿음을 외치면서, 삶 속에 어떻게 공의를 실천할지를 고민하지 않는, 아니 아예 그런 고민 자체를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가슴아파하면서 지금 어떻게 예수님처럼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냉혹한 삶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흩어져서 고립되어 있다. 내가 느끼고 있는 무기력함은 아마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 대신 부동산 투자에 대한 책을 탐독해야 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겨나갈 수 있을지 아득한 것이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부흥은 이런 철저한 무기력함의 고백에서 시작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내 자신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내 삶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더 깨져야 하고, 좀더 무너져야 한다. 내 생각과 방법이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더 많이 깨지고, 더 많이 무너지고, 더 많이 부서지는 것이다. 한 번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은, 1907년의 부흥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