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경제관 – 나의 경우

2010년 1월 12일 오전 트위터에서…

Namturtle98 기독교적 경제관은 뭘까. 바울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믿음 좋은 사람들이 부를 가지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자본주의 사회. 곧 돈이 최고인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lordmiss @Namturtle98 돈을 사랑해서 부자가 된 사람이 성경에 있나요? 별로 고민하실 일이 아닌 듯… ^^ Namturtle98 @lordmiss 그렇군요. 하나님만 따라가다 보면 부는 따라오는 것이겠죠. 단순하게 생각해야겠네요. 반대로 부를 쫓아가는 삶은 결국 디모데 전서의 말씀대로 온갖 악의 뿌리가 되겠죠. lordmiss @Namturtle98 하나님을 따르는 것과 부가 따라오는 것사이에는 별 연관성이 없어요. 아주 단순하죠. Namturtle98 @lordmiss 그렇군요. 부자든 가난하든 복음안에선 크게 중요하지 않죠. 바울의 고백대로.   하지만 부자가 되고픈 저의 욕망. 그리고 크리스천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안타깝고 해서 적은 글이랍니다. Namturtle98 @lordmiss 사실 성경대로의 가치관과 일에 대한 철학. 하나님의 소명 같은 의식이 충분히 뿌리내려 있다면 부자가 안되는게 이상하지 않나 요즘 생각해 봅니다. 혹 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삶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lordmiss @Namturtle98 부자 되지 마세요. 천국 가기 무지 힘들어요. 진짜루요.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Namturtle98 @lordmiss ㅎㅎ 네. 맞죠. 그런데 전 구원받았고 천국이 제 집이니깐 돈많이 벌어서 교회도 세우고 선교사도 돕고 해야겠죠. ㅎ Namturtle98 @lordmiss 로드미스님이 담에 블로그에 성공적인 경제관에 대해 깊이있는 글 한번 적어주세요. 제게 적었다고 맨션 함 날려주시구요. 좋은 하루 되세요.

이 글을 적게 된 배경은 위와 같다.

아래에 적은 것은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경제관과 관련된 이야기. 별 논리는 없이 적어내려간 내용이다.

1. 성경의 부자 성경에 많은 부자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가난한 사람들도 나온다. 중요한 것은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간에, 성경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재물 소유 여부가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사실.

2. 예수님의 경제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셨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재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까지 자신과 같은 생활을 요구하셨다.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에 있어 ‘돈을 의지하는 마음’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신 것이 아닐까.

3. 바울의 경제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악의 뿌리’,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바울의 경제관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한다.

4. 청부론 얼마전 청부론 논란이 있었다. 하나님의 원칙을 잘 지키면서 부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하면 안된다는 것이 골자였다고 생각된다. 이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부지런함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에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라면 훌륭한 개인 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돈을 버는데 있어서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과 부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의미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인 윤리 중에서 부를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검소함과 소명의식 정도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 순진하던지 아니면 사회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대 사회는 ‘돈이 돈을 버는 사회’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부자가 된 케이스를 예로 드는 것은 복권 당첨으로 돈을 번 케이스를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검소함과 소명의식이 중요한 개인 윤리이기는 하나, 그 윤리는 부자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지금까지 사람 사는 사회가 ‘정직한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런 사회가 올 것 같지는 않다. 그래야 한다는 당위는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냉혹한 세상의 논리만 살아남는 곳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의 권세를 마귀가 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5.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우리가 돈을 많이 벌어서 교회도 짓고 선교사도 후원하면 하나님이 그걸 기뻐하실까? 사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교회를 짓는 것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큰 교회에 대한 질책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위해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은 발견할 수 없다. 그 분이 인간이 만든 성전 가운데 제한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은 눈에 보이는 멋진 것에 잘 현혹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따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며,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바로 재물이다. 하나님은 결코 재물로 당신에게 무언가를 해 드리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냥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예수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말했다. 구원받았으니 돈 좀 벌어서 교회에 헌금도 많이 하고, 선교도 도와야지…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교회건 선교이건간에 돈으로 뭔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믿음이며, 선교에 필요한 것 역시 돈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다. 돈 벌어서 교회에 내 놓고 자기 중심적인 삶에 대한 마음의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그냥 자신의 삶 전체를 내 놓아야 한다. 성경에서 돈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된 사건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말해 보시라.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도대체 하나님이 왜 자신의 알량한 (그것이 수천억이든 수십조이든간에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다) 재산을 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6. 결론 최대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를 해 본다. (사실 사회적인 부분, 공동체성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안타깝지만 내게 아직 그만한 내공이 없다.)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것도 제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재능들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좋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잘 하고, 어떤 사람은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 부른다. 이런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달란트’라고 부르며,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물도 그와 같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하나이고,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된다. 어떤 기독교인도 ‘하나님 뜻대로만 살면 키가 커질 수 있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어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뜻대로만 살면 부자가 될 수 있어’라고 (진심으로) 말한다. ‘재물이 많다’와 ‘키가 크다’, 또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정확하게 같은 레벨에 있다고 생각한다. 돈이 돈을 버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7. 추가 Namturtle98님의 ‘전 구원받았고, 천국이 제 집이니까…’ 라는 말 속에서 구원관과 관련된 말을 추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구원은 일회적인 사건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성경은 강조한다. 바울은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조언한다. 일단 구원은 받았으니, 이제 돈 좀 벌어봤으면 좋겠다는 말은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구원을 값싼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내 삶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더욱 많이 닮아가야 하는 사명이 있을 뿐, 돈을 벌거나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일 따위의 사명은 없는거다.

사랑의교회 재건축 논쟁과 관련된 생각

최근 벌어지고 있는 사랑의 교회 재건축 관련 논란을 보면서 중요한 것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의 일원이 되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처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초대교회를 봐도 ‘교회의 일원’이 반드시 ‘구원받은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 그리고 (아마도 많았을) 배교자들) 더 어려운 것은 ‘공동체’라는 단어에 있는데, 이 공동체라는 것이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용하는’ 정도의 수준까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교회 공동체는 아마도 가족 공동체와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갖는 것임에 틀림없다. ‘핏줄’이라는 요소에 의해 지배받는 가족 공동체와 달리 이 공동체는 ‘믿음’이라는 요소로 지배받기 때문에 새로운 구성원의 추가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어느 교회를 가 봐도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구원의 확신’ 보다는 ‘꾸준한 출석’이 더 중요하다. 사실, ‘구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개인 차원의 문제이므로 실제로 이 부분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가족 공동체’ 수준의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가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일 때, 그리고 그 모임이 진정한 ‘공동체’일 때,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교회 구성원들의 신앙 상태를 확인하고 점검할 수 없고 공동체 의식의 순수성 역시 검증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된다. 이 순간이 언제인지 수치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가 회사 고유의 문화를 지키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도 그 교회 특유의 공동체성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교회가 자신의 공동체성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까지 스스로 분열하는 것 뿐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 분열이 실제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든, 아니면 구역, 가정교회, 지교회 등의 세부적인 조직을 의미하던간에 상관없이. 즉, 본질적으로 교회는 분열하게 되어 있다.

분열하지 않고 크기를 키워가는 교회는,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른 수단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즉, 스스로의 공동체성의 필수 요소들을 조금 포기함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던지, 혹은 공동체성의 유지를 위해 신앙의 요소가 아닌 다른 요소를 도입하던지.

많은 경우, 한국 교회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담임목사님에 대한 애정 (혹은 충성심)이다. 그리고, 신앙의 본질과는 크게 연관이 없어보이는 어떤 지엽적인 요소를 강조함으로서 여타 교회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전략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예를 들어 ‘새벽기도가 뜨거운’ 교회, ‘제자 훈련이 우수한’ 교회, ‘선교에 매진하는’ 교회 와 같은 캐치프레이즈들이다.

어느 것도 그 자체만으로 비판을 받을만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교회의 크기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네 개의 복음서가 서로 다른 신앙공동체에 전승되던 믿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믿음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 전승을 갖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고대와 같이 공동체들이 단절되어 있는 상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 작용을 하고 있는 현대의 상황에서 공동체들간에 네 복음서 공동체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거리일 수는 없다는 생각만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결국, 보편적인 종교가 되기 위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부각시키려는 교회의 욕구, 그리고 차이가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다른 말로 카톨릭을 추구하는) 교회의 조바심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수만명이 예배드릴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수천억의 돈을 들여 새로운 건물을 짓겠다는 사랑의교회와 관련해서, 그 돈을 어디다 쓰는 것이 좋겠다라던가, 헌금 강요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수만명의 성도들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인가를 묻고 싶다.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힘이 과연 같은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적 신앙인지 아닌지를 묻고 싶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만명의 성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 공동체적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서조차 궁금증을 갖고 있는 내게는 그 대답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