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마을의 삶

DSC02431 우리 어머니는 산골마을에서 나서 자라신 분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학교를 가기 위해 그야말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1시간을 걸어야 하는 그런 산골에서 자라셨다. 강원도 횡성군 안흥면 송한리. 이게 바로 그 마을의 이름이다.

이 사진은 내가 2004년 8월에 찾아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근처에 집이라고는 하나 없고, 그저 이 사진에서 보이는 집이 유일한 집이었다. 차를 타고 꼬불꼬불 좁은 산길, 그것도 차 두대가 중간에서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해지는 그런 길을 한참이나 올라서야 도착한 곳이었다. 사진에 보이는 집이 바로 우리 어머니가 사셨던 집 위치에 있는거라고 한다. 거기서 산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서 학교를 다니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고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그야말로 지금은 아무도 다닐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완전한 첩첩산중이었다. 사람이 한 번도 밟은 적이 없는 하얀 눈을 밟아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낭만일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의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가장 견디기 힘든 일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지금은 안흥도 찐빵으로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찐빵으로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고 있다고 한다. 또, 주천강이 바로 옆에 있어서 휴양림이며 펜션 단지로 개발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송한리는 옛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옛날보다 사람이 더 줄어서 이제는 거의 사람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자연이 사람을 키우고 먹인다는 간단한 이치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MayaChemTools

MayaChemTools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있다. GNU LGPL에 의해 배포되는 무료 프로그램으로서 perl로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원래 펄이라는 언어가 텍스트 프로세싱에 유용한 언어인데다 역사가 깊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라이브러리가 존재하는 것이 큰 강점이다. 루비가 깔끔하고 좋은 언어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비해 라이브러리가 많지 않다는 점은 분명히 약점 중의 하나이다. (물론 이 약점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이 mayachemtools라는 프로그램을 찬찬히 뜯어보면 굉장히 멋진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sdf 파일과 csv, tsv 파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실제로 아직까지 cheminformatics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sdf 파일의 내용을 일관적으로 관리하고 그 정보를 가공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sdf 파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 중의 하나이다. 게다가 cheminformatics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적인 실험 데이터들은 대부분 csv 형식으로 저장될 수 있기 때문에, 실험과 관련된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csv 파일에 들어있는 정보를 처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본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mayachemtools 이다. 그리고 이런 기능이 거의 텍스트 프로세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펄을 사용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선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데이터는 텍스트로 관리되어야 한다. 최근에 MS 오피스도 자체 포맷을 xml 형태로 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이런 것도 결국은 호환성이나 실용성을 따져보았을 때 텍스트로 관리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용량의 면에서도 텍스트 파일을 gzip같은 알려진 압축 포맷으로 압축하여 보관하고, 프로그램에서 읽을 때 압축을 해제하는 과정을 한 번 더 거치게 되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게다가 이런 압축과 압축 해제에 필요한 모든 루틴들은 거의 표준화되어 공개되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ChIPS같은 cheminformatics database system 을 만드는 일에 참여를 하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적절하게 묶고 integration 함으로서 아주 좋은 어플리케이션을 제공하게 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밤에 듣는 비발디

비발디의 스타바트 마테르…

자극적인 모델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 음반이 이런 음악을 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까지 느껴지는 음반이다.

거금을 들여서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마련한 파나소닉 CT-590을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에 오고가는 두 시간 동안 음악을 듣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학교를 나오면서 플레이를 시작했다.. 저녁 시간의 학교는 조용해서 볼륨을 높여놓지 않아도 듣고 싶은 음을 놓치는 일이 거의 없다. 경쾌하게 시작하는 바로크 음악이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어느덧 걸어가는 속도도 음악의 속도에 맞추어지는 듯 하다.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귀에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끼고 무언가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처럼 비발디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문득 생긴다.

학교 정문에서 전철역까지는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과 많은 소리들 속에 묻혀서 가는 길이다. 음악은 들렸다 안들렸다 하고, 사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피해가느라 음악에 신경을 쓰는 것도 쉽지 않은 지경이다. 눈을 자극하는 많은 불빛들과 이어폰의 음악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만드는 쿵짝거리는 스피커의 함성들… 욕망이 토해지고 소비되는 거대한 모습을 몸으로 느끼게 되는 길이다.

이제 전철역 안으로 들어서면 그나마 소비와 향락의 불빛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전철 안은 소리로 가득하다. 이어폰의 볼륨을 높여서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다보면 어느새 옆 사람이 내가 듣고 있는 이 음악을 듣게 될 정도가 아닐까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되기도 한다. 사실 사람이 붐비는 전철 안에서 정말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떠올리는 온갖 상념들이다. 이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까… 그리고 지금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내가 갖게 되는 이런 부질없는 생각들을 그들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항상 하는 이런 생각들이 변합없이 머리 속을 채우면서 음악에 대한 집중도는 자연히 떨어지게 된다.

전철에서 내려서 이제는 마을버스를 타야 할 순서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왠지 마을버스를 타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소음 속에 묻혀서 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들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몇십미터를 걸었을 뿐인데도 벌써 주변은 조용해진다.

맑은 밤하늘이 검게 티없는 하늘이기에는 주변에 빛이 너무 많다. 그리고 약동하는 음의 향연들을 즐기기에는 너무 많은 소리가 있다. 그래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듣는 비발디의 음악은 순간적으로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사라지게 한다. 어느덧 음악은 초반의 경쾌한 분위기에서 제목 그대로 ‘스타바트 마테르’의 느낌을 전달해 주는 처연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다. 사라 밍가르도는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음악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전달해 주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확실히 카운터 테너가 전달할 수 없는 느낌이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서 전해진다. 빛과 소리는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하지만, 음악을 타고 전해지는 감정만큼은 점점 더 고조가 된다. 이제야 밤의 분위기에 동화되어가는 느낌이다. 점점 침잠해져가는 밤의 분위기와 깊은 슬픔의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는 성모의 아픔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집이 가까와 오니 바이올린와 하모니움의 소리가 조금은 맥이 빠지게 들리기도 한다. 좀더 내밀었으면 좋겠는데… 좀더 길게 끌어주었으면 좋겠는데… 고양된 침잠함과는 어긋나는듯한 짧은 바이올린의 호흡이 기이한 조바심을 느끼게 한다. 이제 다왔구나… 이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한 시간이 끝나가는구나…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가방에 다시 집어넣으면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단 한 시간동안 음의 향연에 빠져서 오던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내게 티없이 맑은 완전히 깜깜한 밤하늘과 소리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을 제대로 편안하게 즐길 수 있을만한 마음의 빈 자리는 있는지 생각을 해 본다.

마음의 평안이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내 마음은 여전히 번잡하고 많은 생각들로 가득차 있어서 조금만 환경이 맞지 않아도 그걸 쉽게 포기하고 만다. 어차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 많은 빛과 너무 많은 소리로 가득차 있다면, 그 속에서 내가 들어야 할 소리와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구별하는 방법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필요없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소리들이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몸부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걸 그 모습 그대로 즐기는 방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올드 보이를 보다

사실 올드보이가 칸에서 큰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아니었으면 그게 아무리 잘된 영화라고 해도 시간을 들여서 보고 싶은 마음은 아마 생기지 않았을거다. 근데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참 간사한거라 왠지 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사람은 원래 바쁘면 더 딴짓이 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_-;

대강의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주인공이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면서 한 곳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원인이 근친 상간과 관련된 무언가라는 사실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고, 최민식이 무지하게 연기 잘한다는 말, 그리고 유지태가 그 역을 연기하기 위해 살을 많이 찌웠다는 말도 들었었다.

영화 자체의 짜임새는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대로 주의가 분산되지 않도록 두 시간 동안 사람의 신경을 집중하도록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잔인하고 비상식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그런 부분에 너무 적응이 되어 있는 것인지, 그냥 보아 줄 수 있는 정도였다.

정작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그처럼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라는 말에서 복수라는 단어였다.

누나와의 금지된 사랑을 통해 저질러서는 안되는 범죄를 저지른 유지태, 평범한 삶을 사는 듯 했지만 결국 딸과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되는 최민식. 결국 사람이란 그런게 아닌가. 하나 하나 까발리고 풀어헤쳐 놓으면 추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수는 복수를 낳고 피는 피를 낳게 되어 있다. 근친간의 사랑이라는 파격적인(혹은 그래 보이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데서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딸과 아버지의 관계를 통해 자식이 태어나는거야 성경책을 봐도 나오는 이야기이니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아버지 유다를 일부러 취하게 만들고 밤에 조용히 아버지를 순서대로 겁탈하는 유다의 두 딸 이야기가 훨씬 더 엽기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더러운 모습이 복수라는 단어로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복수가 되었건 용서가 되었건간에 사람은 어쨌든 참 약하고 간사한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행동을 무의식 중에 따라하고 모방하게 되어 있다. 모방은 실제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의식은 무뎌지기 마련이다.

복수심이 아니면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올드보이의 두 주인공은 결국 같은 사람이다. 모래알이건 바위이건 물에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말인즉 맞는 말이라는 뜻이다. 1미터를 뛰건 2미터를 뛰건간에 10미터를 뛰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과 같다.

결국 사람은 더럽고 추악한 존재다. 그건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다.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고 산다면 세상은 그냥 복수로 가득차 버릴 것이다. 세상에는 죄악이 가득차 있지만 복수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그냥 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상태란 더 나빠질래야 더 나빠질 수가 없는 상태니까…

수레바퀴를 반대로 돌리는 것은 돌아가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복수보다는 용서가 훨씬 어려운 법이다.

그런 면에서 올드보이의 잔인함에 비해 훨씬 더 잔인한 장면으로 연속하고 있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훨씬 더 솔직하게 용서를 말하고 있음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더러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면서 그냥 그렇게 더럽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런 차라리 솔직한거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 사람의 모습을 알고 있으면서도 용서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더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난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해병대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렇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자신의 모습이 더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삶 속에 거룩함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냥 본성에 따라 솔직하게 사는 것보다 수만배는 더 어려운 길이다.

그냥 느낌대로 솔직하게 사는 것에 머물러 있다면 그게 바로 늙은 아이, 그러니까 올드보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