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독서일기

창세기 설화

개신교 교회와 지도자들은 창세기가 설화로 되어 있다는 지식에 반대하여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로를 차단할 것이 아니라, 이 지식이 없다면 창세기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짧은 평: 창세기를 ‘설화’라는 단어로 해석해낸 책. 창세기 뿐 아니라 성서를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관점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하다!

성서의 시작이면서 태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립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창세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믿음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을 대할 때 가장 일반적인 태도라면, 이 책을 다른 책들과 다를 바가 없는 동일한 기준으로 읽는 것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일점 일획도 바꿀 수 없는’ 방식으로 읽게 되면 이 책을 일종의 관찰 보고서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책을 모세가 기록했다는 전통적인 이해와 책 안의 연대 기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요셉의 이야기는 모세로부터 최소한 400년이 지난 이야기이고 노아의 이야기나 그 이전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도 훨씬 오래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지금 시대로 생각을 해 봐도, 수백년 전의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이 바로 역사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일어난 일로 생각한다는 것은 지나친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궁켈은 몇 가지 중요한 분석을 통해서 창세기를 모아서 편집한 편집자가 서로 다른 종류의 전승으로부터 수집된 자료를 솜씨있게 배열하였으며, 자신의 생각에 배치되는 자료라고 하더라도 널리 알려진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포함을 시키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가장 분명한 예라면, 아마도 서로 다른 두 가지 창조 설화를 그대로 실어 놓은 창세기 1장과 2장일 것이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교양 필수 과목인 ‘성서와 기독교’라는 수업을 들을 때, 문상희 교수님 (1998년에 돌아가셨다. 내가 1993년에 수업을 들었으니, 그 분의 거의 마지막 강의를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께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설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는 숙제를 내 주신 것이 기억이 난다. 누가 보아도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모세오경이라면 3천년을 읽어온 책인데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오면서 이에 대한 의구심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이런 질문은 ‘신약에서 서로 다른 네 개의 복음서가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는 질문이 된다.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단 한 가지 시선과 해석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어떤 사건이든 그것은 해석되어야 하며, 그 해석은 해석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생명력이 있는 이야기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심적인 가치는 유지된다는 것이 또한 그 생명력의 놀라운 점이다. 그것이 바로 궁켈이 ‘설화’라는 단어에 담은 뜻이며, 시대와 장소에 상관 없이 인간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원형적인 이야기들이 설화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야기가 바로 창세기인 것이다.

이 책은 궁켈이 쓴 ‘창세기 주석’의 서론을 번역한 것이다. 성서를 깊이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주석 전체를 읽고 싶겠지만, 이야기의 상세한 해석보다 창세기 (또는 성서)라는 책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로서는 이 서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지혜말씀으로 읽는 욥기

그러므로 제 잘못된 말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에 관한 생각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욥 42:6, 저자의 번역 제안)

짧은 평: 욥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지혜서로 해석하면서 이 책의 특징을 잡아낸 점이 신선하다.

욥기 42장 6절을 개역개정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로, 새번역에서는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로, 공동번역에서는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로 번역하였다. 모두 후반절의 내용을 ‘회개’로 번역한 것이다. (NIV, KJV 등의 영어 성경에서도 모두 repent를 사용함) 이렇게 하면 욥기 전체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던 욥이 하나님의 연속적인 반문을 듣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원문을 다시 해석하여 “티끌과 재에서 회개”가 아닌 “티끌과 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티끌과 재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의미하므로, 결국 욥은 하나님과의 질의 응답을 통해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번째 응답에서 베헤못이나 리워야단에 대한 찬사는, 인간이 그런 존재들보다 못하지 않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욥이 인과응보, 상선벌악, 또는 신명기적 신학에 대해 묻고 따지는 그 행위 자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패망과 포로됨이라는 역사 앞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현실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신명기적 해석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욥의 이야기를 통해 교리적인 순종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항변에 가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성경을 관통하는 신학이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룻, 요나, 욥, 아모스 등은 이른바 이스라엘의 정통 신학에서 벗어나 있을지 모르지만, 숨막히는 교리와 기계적인 인과응보에서 벗어난 곳에,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생각과 외침 속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되는 역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그런 이해 없이 한 곳에 머무르는 신학은 욥의 친구들로 표현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책을 읽을 때 떠오르는 궁금증은 현대 유대교에서는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봄으로써 지금의 내 생각의 지평을 많이 넓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