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와 부동산

바야흐로 구독형 서비스의 시대이다. 음악은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스포츠 중계와 같은 영상도 구독형 서비스에 가입하여 즐기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라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공테이프에 녹음하고 표지를 만들던 시절, 용돈이 생기면 카세트 테이프를 하나씩 사서 모으던 시절, 그리고 CD 패키지의 안에 들어 있는 오페라 원문 가사를 옮겨 적고 번역을 해 가면서 오페라를 듣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일본에 출장갔던 분이 희귀한 공연 실황이 담긴 LD를 사오면 음악 감상실에 함께 모여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상을 봤던 것이 기껏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이제 독서도 구독형으로 즐기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존의 킨들 서비스를 부러워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도 리디 셀렉트, 밀리의 서재 등의 서비스가 생겨나고 있고 전통의 강자인 교보문고나 Yes24도 유사한 서비스를 하고 있다. 아마존 킨들이라는 어마어마한 서비스만큼 되기가 쉽지는 않겠고, 한국어로 되어 있는 책의 수나 그걸 읽는 독자의 수라는 측면에서 충분한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질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최소한 국내 기업들이 서비스하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나 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정도의 위치는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든다. 도리어 영화나 음악에 비해서 책이 언어적인 장벽이 더 높을 거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나는 음악과 영상에서 구독형으로 넘어가는 것이 매우 늦은 편이었고, 책에 대해서는 더욱 그래서 최근까지도 ‘정액 요금제에 가입만 하면 무제한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해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종이책을 사지 않고 전자책으로만 책을 사기 시작한지 꽤 오래 되었고, 리디북스에서 보유한 책이 3천여권이 되어 가는 것을 고려하면 나야말로 이런 무제한 서비스가 잘 맞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구매용 전자책조차 양과 질에서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내게 구매용 전자책보다도 훨씬 양과 질에서 못미칠 것이 분명한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 아이디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종이책을 사는 경우는 Yes24에서 아이들 책을 사는 것이 전부이다. 학교에서 지정해 주는 필독 도서, 학원에서 지정해 주는 문제집, 그 외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책을 사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실적이 되기 때문에 플래티넘 회원이 된지 시간이 좀 지났다. 그런데 얼마 전에 Yes24 북클럽 3개월 무료 제공이라는 혜택까지 받게 되었다. 사실 이걸 쓸 생각도 별로 없었는데,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경우도 있으니 북클럽에 책이 있다면 그 수고를 아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북클럽에 가입을 하고 이 무료 서비스를 써 보기로 했다.

북클럽 첫페이지에서는 신규와 인기 두 가지 탭으로 나누어 책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내가 관심이 가는 책을 제목이나 주제 등으로 검색한 경우에는 읽고 싶은 책을 거의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내가 유행하는 책 또는 베스트셀러들 보다는 마이너한 주제의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걸 감안하더라도 책의 양과 질에 대한 내 선입견을 깨기에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구독형 서비스를 사용하게 되면 내가 적극적으로 관심이 있었던 콘텐츠가 아니라 ‘구입형이었으면 절대 돈을 쓰지 않았을법한’ 콘텐츠도 소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몰랐던 콘텐츠를 만나서 새로운 취향을 개발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Yes24 북클럽에서 내가 골라서 본 책 중의 하나는 대한민국 부동산 전쟁이라는 책이다. 내가 부동산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젊은 세대여, 10년 후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린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고 매일경제신문사에서 발간했으며 저자들이 무슨 부동산학과 교수며 부동산 사이트의 팀장이며 그런 사람들이니, 내가 돈을 주고 이 책을 산다는 것은 일어날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혹시 내가 모르는 어떤 중요한 통찰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이 책은 이북 기준으로는 200페이지도 되지 않은 짧은 책이고 (Yes24 앱은 기본 설정의 글씨 크기가 매우 작은 편이다) 그나마도 많은 그림이나 표가 들어 있고 여러 명의 저자들이 쓴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은 제대로 집중해서 읽어야 할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빠르게 훑어보는 독서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동산이라는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전쟁터와 같은 곳임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 선수로 뛰면서 전체 판을 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인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 경기장 안에서 뛰는 모든 선수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욕망이라는 이름 앞에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4억짜리 아파트가 8억이 되고, 8억짜리 아파트가 15억이 되는 일이 불과 1~2 년 내에 일어나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이런 욕망의 게임에 몸을 던지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되는 것 같고, 내 노동의 가치가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때문이다. 어쩌면 부동산은 비트코인같은 것에 비하면 훨씬 상식적이고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욕망의 분출을 보는 것,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어서 자신(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토지정의사회연대와 같은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도리어 이런 부분에 대해 잘 모르는 이른바 부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진리이지 복잡하고 화려하게 포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이다. 땅은 가치 생산의 원천이자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공공재이다. 집은 주거의 공간이지 재산 증식의 수단이 아니다. 법이 필요한 이유는 무한히 늘어나려고만 하는 욕망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등등…

책을 쓰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그 행위를 한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원래 어떤 일이든 직접 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평가하는 것이 훨씬 쉬운 법이다. 저자들이 어떤 고민과 생각을 가지고 책을 썼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내가 읽어내야 할 어떤 지점을 놓쳐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이브하게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들은 나를 설득하는데 실패했고 나는 선입견을 강화만 한 채로 독서를 마쳤다. 저자들에게 이 사실이 별 타격이 되지 않겠지만, 내게도 별다른 타격이나 변화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일에 짧게나마 내 시간을 사용했다는 것이 아쉬울 뿐.

마지널리티

두 세계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세계의 경계에 있는 주변부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non-being 처럼 느낀다. 실존적 무 nothingness 는 둘 이상의 지배 세계의 관점에서 기인한 비인간화의 근원이다. (83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예수가 새로운 주변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는 것은 주변부 사람의 마음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새로운 주변부 사람의 마음이 양자 부정과 양자 긍정의 사유방식을 통해 작동한다면, 이 사유 방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해석학적 원리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두 세계 사이에 살았던 아웃사이더로, 십자가에서 백성에게뿐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거부당했다. 그는 확실히 어느 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에 있던 사람이었다. (124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기대하지 않았던 책에서 굉장한 보물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가 이 책을 보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내가 저자에 대해 또는 그가 펼치는 주제에 대해 과문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제목과 앞쪽 몇 페이지만 읽어보고 (리디북스에서는 대부분의 책에 대해 미리보기를 지원한다) 이 책을 구매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쓴 이정용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자신을 표현할 때 “나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아시아인 이상이며 아시아인이기에 미국인 이상이다”라고 쓰고 있다. 두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기 힘든 과거일수록 이런 경험이 흔하지 않은 것이었을텐데 그나마 최근에는 이동의 거리가 넓어지면서 이런 주변부성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짧지만 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외국에서 살아본 또는 살고 있는 경험이 아니더라도 주변성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은근히 많다. 사람은 끊임없이 패거리를 만들고 거기에 소속되려고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패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한다는 것이고,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패거리의 행동 양식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모가 큰 패거리일수록 이런 구분 방법이 정교하고 강력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중심부와 주변부의 갈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느냐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 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에 대한 지침이 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지은이가 주창하는 주변성 신학 역시 기독교를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는 시도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대단히 유효한 일일 수 밖에 없다. 특히 2020년의 대한민국 교회는 지은이가 말하는 이 대목을 귀 기울여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힘과 위엄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한 것이 사실 그의 약함이었고, 그를 주의 주로 만든 것이 겸손이었음을 잊었다. 예수의 종 됨보다 주 됨에 더 관심을 갖고, 예수의 죽음보다 부활에 더 열광했다. 예수는 중심 집단의 학자들에 의해 형이상학적 사색의 대상이 되었고, 특권층 교회 사제들에 의해 칭송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중심에 예수가 있기를 원한다 해도, 우리가 추구하는 중심은 진정한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중심이고, 권력과 지배를 추구하는 중심이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너의 생각이 사람으로부터 왔다”라고 했다. (133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그렇다면 지은이가 주장하는 주변성 신학은 어떤 삶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은 중심부 가치 이데올로기와 투쟁하며 사는 창조적 삶에 대한 비전이다. 예수가 자신의 백성에게 거부당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거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거부를 극복해낸 것이다. 이 극복은 고통을 해소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직면해 싸운다는 뜻이고 그 싸움을 사랑과 섬김으로 이겨냈다는 뜻이다. 이 싸움은 적응하고 익숙해질 일이지만,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믿음 없이는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그 싸움을 사랑과 섬김으로 이겼다는 것을 믿어야만한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예수 자신이 주변부 사람이었기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주변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고 쓰여지고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신학은 주변부적이며 자서전적일 수 밖에 없다. 주변성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 주변성을 극복하면서 어떻게 뿌리깊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모든 사람을 화합시킬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교회가 중심부의 매력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회중들이 위계 구조적 특권의 사다리를 오르도록 꾀어내는 것은 종교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중세 기독교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를 따라 스스로의 주변성을 깨달아야 하고, 사랑과 섬김이라는 방법으로 중심부에 들어가려는 욕망과 싸워야 한다. 천국은 모든 사람의 개성이 그대로 하나님의 본성과 합일되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중심이며 모든 사람이 주변부인 것이다.

SAM 7.8 plus pen 이야기

나는 이미 이 블로그 글에 적은 것과 같이 주로 전자책으로 독서를 한다. 국내에 전자책을 파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초반에는 여기저기서 한두권씩 구매를 하다가 최근에는 대부분의 책을 리디북스에서 구매를 하고 있다. 리디북스에 없는 전자책에 한해서 교보에서 구매하는 경우가 좀 있는 정도이다. 리디북스에 대략 3천권 가까운 책이 있으니 당연히 주력 기기는 리디페이퍼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전화기나 아이패드에서는 적은 수의 만화책을 보는 정도이고 아마존에서 구매하거나 무료일 때 받아놓은 영어 책을 읽는 정도였다. (사실 영어 책을 읽기 위해서 킨들도 하나 가지고 있다. 킨들은 아마존 책을 읽는데는 최고이지만 아마존을 벗어나면 의미가 별로 없다)

리디페이퍼는 6인치여서 좀 아쉬움이 있었고 리디페이퍼 프로는 7.8인치여서 훨씬 나은 독서 환경이었다. 다만 가장 아쉬운 점은 리디페이퍼는 루팅을 하지 않는 한 다른 서점의 책을 이용할 수 없고, 루팅을 하더라도 다른 서점의 앱들이 그렇게 원활하게 구동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난 1월에 미국 출장을 갔을 때 엄청 붐비는 컨퍼런스 미팅 장소에서 봤던 전자책 기기는 어떤 제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펜으로 쓰는 것이 가능해서 굉장히 마음에 들어 보였었다. 아마도 보위에나 오닉스 기기 중에서 펜을 지원하는 기종이었겠지. 그건 아이패드 크기였으니 10인치 정도 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런 크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펜으로 필기까지 되는 이북 리더는 가격이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게 아쉬운 점이다.

결국 교보에서 sam 7.8 plus pen이라는 제품이 나왔을 때, 이게 내가 지금까지 기다려온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 이 기기가 배송되어 있었다. 예판 때 구매를 한 것이어서 할인은 물론이고 전용 케이스나 sam 무제한 6개월 같은 혜택도 받았다. 사실 전용 케이스는 무게가 늘어난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커버를 열고 닫는 것을 인지하여 켜지고 슬립모드로 들어가기 때문에 배터리를 아끼는데 도움이 되고 펜 수납도 가능하기 때문에 지금은 케이스를 사용하고 있다.

이 기기가 갖는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안드로이드 8.1 기반: 교보는 물론이고 리디북스와 킨들을 모두 설치하여 사용하고 있다. 알라딘이나 예스24 책도 있기는 한데, 크레마 앱에서 제대로 구매목록을 불러오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서 지금은 쓰고 있지 않은 상태다. 서점 앱 말고도 갓피플 성경이나 영한 사전 같은 앱도 쓸 수 있는 것이 안드로이드 사용의 장점이다.
  2. 펜 사용 가능: 필기 목적으로의 사용은 기본 제공되는 메모장 정도에서만 할 수 있지만 그것만 해도 꽤 쓸만하다. 그리고 각종 서점 앱에서도 페이지 넘기기나 형광펜 같은 기능을 위해서도 펜을 쓸 수 있으니 좋다. 펜을 충전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펜이 가볍다는 것도 애플 펜슬에 비해 좋은 점이다.
  3. 7.8인치 화면 크기: 이 크기는 보통의 문고판 서적을 읽는데 최적이고 휴대에 적합한 크기이다. 영어 서적을 읽을 때 킨들이 좋다는 언급을 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킨들 페이퍼화이트 3세대에 비해 샘에서 읽는 킨들 책이 더 좋게 보였다. 앱의 빠릿빠릿함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고. pdf 문서, 특히 논문을 보는데는 10인치 이상의 크기가 최적이기는 한데 논문의 경우에는 보통 텍스트만 중요한게 아니고 그림을 봐야 하는 경우도 많아서 이럴 때는 전자잉크의 흑백화면은 한계가 있다. 내 경우에는 논문은 그냥 아이패드로 읽는다.
  4. 블루투스 지원: 리모컨을 쓸 수 있다. 물리 키가 없는 단점을 어느 정도는 메워줄 수 있는 점이다.
  5. 스피커 지원: 오디오북을 쓸 수 있다. 사실 오디오북은 자차를 이용하는 시간이 많을 때 유리한 것인데, 내 경우에는 직접 운전을 해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므로 거의 쓰지 않는 기능이기는 하다. 그래도 블루투스 지원까지 되니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6. Micro SD 지원: 적지 않은 책을 구매했기 때문에 기기 자체의 용량만으로는 책을 모두 넣어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대부분의 기기처럼 micro sd 지원이 되니 책을 모두 다운로드 받아서 가지고 다닐 수 있다. 64GB 한 개 넣으면 리디북스, 킨들, 교보문고와 구입한 책들을 모두 넣어도 용량이 남는다.

단점도 없지는 않다.

  1. 물리키가 없다: 물리 키가 있다는 것이 리디페이퍼 프로 기기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있다가 없으면 그게 꽤 거슬리기는 하다. 그래도 적응 되면 좀 낫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중.
  2. 아이리버 기술지원: 사실 이게 단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리디페이퍼 기기들의 경우는 꾸준하게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하면서 기기를 관리해 주었는데 아이리버에서도 그렇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대체적으로는 걱정하는 분위기가 더 많은 듯.

전자책 기기는 책을 읽기 위한 보조 도구이다. 책 자체는 아니니 많은 돈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아이패드라는 훌륭한 태블릿에 비하면 속도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한참 뒤떨어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 잉크의 매력은 눈이 편안하다는데 있다. 책을 넘기는 속도는 아무리 빨라도 아이패드같은 엄청난 성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태블릿이나 전화기는 신경을 빼앗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하다못해 알림이나 유튜브 같은 것들이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때문에 이런 기기에서는 일정 시간 이상 책에 집중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좋은 전자책 기기는 책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된다. 눈 건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책 이외의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환경은 책 자체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최소한 몇 년 간은) 샘이 내 독서 생활의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춘추전국이야기 1 춘추의 설계자 관중

관중의 사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경제학의 입장에 서 있다. 그것도 오늘날의 협소한 경제학이 아니라 방대한 스케일의 정치경제학이다. 관중의 사상은 유학의 사상보다 밑바닥을 훨씬 잘 이해했다.

232 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관중은 분업과 클러스터를 통해 지식(사), 농업(농), 공업(공), 상업(상)의 생산성을 동시에 늘리자고 주장한다. 농업을 위주로 하되 공업과 상업도 국가의 근간이 된다는 것이다. 경제이론의 일대 전환이다. 그 이면에는 관중식의 ‘노동가치이론’이 있다. 관중은 노동생산성을 국력의 척도로 보았다. 농업을 위주로 하되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지 않는 것이 관중의 이론이다. 공업은 생산성을 발달시키는 도구였으며, 상업은 물가를 조절하는 도구였다.

302 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관중은 착하지만 당하며 사는 사람보다는 강하지만 덜 괴롭히는 사람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자 제나라의 주변국들은 관중의 관대함을 칭찬했다. 국제관계에서 그는 민족 간의 평등이 아니라 존왕양이를 주창했다. 그러자 공자는 “관중이 없었으면 중국이 다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칭찬했다. 차선을 행하면서도 이렇게 칭찬받는 것이 관중의 특징이다.

378 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의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상이라는 측면에서도 그 다양성이 최고로 발휘된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공자와 맹자를 포함한 유가 사상이 (다른 사상들과 경쟁하며 혼합 변경되기는 했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동아시아 전체의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지만, 그 날것의 사상은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의 시기에 배태된 수많은 생각들 중의 하나였으며 백가쟁명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그 사상들은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기도 하는 관계였다.

이 책은 (이전에 이 시대를 다룬 대부분의 책들이 그랬듯이) 단순히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그로부터 단순한 교훈을 이끌어내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위에 언급된 것과 같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갖는 의미를 현대적인 의미에서 재해석하고 돌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관중을 정치경제학에 기반을 둔 사상가로 본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 노동가치이론이 있다고 해석하는 식이다.

이런 해석은 춘추전국시대를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 역사의 배경이 되는 중국 지역의 지리적인 특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지리적인 특징을 어떻게 이용하고 극복하는가가 중요할 수 밖에 없는 시대의 이야기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곳에 살고 있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 부분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그 부분에서 이 책이 갖는 가치가 있다. 나도 나름대로는 중국의 역사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본 축에 든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처럼 각 나라들이 어떤 환경에 있었고 그 지리적인 특징이 어떤 대응을 만들어냈는지를 명확하게 풀어서 설명해 준 책은 없었다. 좀더 구체적인 측면에서는 삼국지의 제갈량이 스스로를 관중에 비교했다고 했을 때 그 의미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 책만큼 명확하게 설명해 준 책은 없었다.

모두 11권이나 되는 긴 시리즈이지만 첫 책에서부터 이렇게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시작을 하니 나머지 10권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나머지 10권을 모두 읽고 나면 중국의 (아니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시선이 한층 업그레이드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11권을 모두 읽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이라면 그냥 1권만 읽어보기를 권한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코스모스

짧은 평: 중요한건 생각하는 방식이야!

들어가는 말

칼 세이건이 쓴 이 책은 유시민이 ‘무인도에 단 한 권의 책만 가져갈 수 있다면 이 책을 가져가겠다’고 했다는 책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주의 광대함, 그리고 인간의 보잘것 없음, 그리고 그 인간의 위대함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이 달에 착륙하고 태양계의 바깥쪽을 향해 우주 탐사선을 쏘아올리던 시대에, 2020년에 인류가 바이러스로 인해 고생하고 있을거라고 예측을 할 수 있었을까? 우주로 가는 노력들은 충분한 예산을 지원받지 못해서 좀처럼 뉴스에 나오는 일이 없고, 우주를 향한 위대한 도전을 아낌없이 지원하던 미국 정부 대신 테슬라의 괴짜 CEO가 상업용 우주 여행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가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는 관계가 없다.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 이야기하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스스로의 한계와 약함을 깨닫게 되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가설의 장점을 바라봐 주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 책은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야 하는 것이다.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

물론 오래 전에 쓰여서인지 구체적인 부분에서 동의하기 힘든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우주에 대한 내용들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 정확하게 따지기는 힘든데, 내 전문 분야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잘못된 표현들이 꽤 보였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

알려진 유기 분자의 수는 100억개가 넘지만, 이 중에서 생명 현상의 필수 요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약 50종 뿐이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기 분자의 수는 약 몇 억개 수준이다. PubChem에는 현재 대략 1억 1100만개의 화합물 구조가 등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무기 분자도 있으니 유기 분자의 수는 이보다 적다고 볼 수 있다.”알려진”을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으로 바꾸면 100억개는 너무 작은 숫자가 된다. 이 논문에서 C, N, O, S 그리고 할로겐 원소 17개까지만 사용해서 만들 수 있는 화합물의 개수가 1664억개 정도로 보고하고 있고 (이 화합물들의 데이터베이스가 GDB-17이다), 사용 가능한 원소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 숫자는 엄청나게 커지는데다가 P(인) 같은 원소를 더 넣으면 숫자는 더욱 커진다. 단순한 enumeration으로 가능성 전체를 세는 것은 참으로 큰 숫자를 따져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게다가 “생명 현상의 필수 요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약 50종 뿐이라는 것도 사실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아마도 DNA나 RNA의 기본 조각인 핵산과 단백질의 기본 조각인 아미노산, 지방에 사용되는 지방산, 탄수화물의 기본 조각인 당 정도를 합쳐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생명 현상에 필수적인 유기 분자는 이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일 것이다.

유용한 핵산을 조합하는 방법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전자와 양성자의 수를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enumertion하면 우주에서 셀 수 있는 어떤 것의 숫자와는 비교가 안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에 달려있는 “유용한”이라는 형용사이다. 핵산을 단순히 조합하는 것만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숫자가 나오겠지만 그것이 유용성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특징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환경과 상황에 따라 “유용함”의 정의가 달라질 것이니 지구에서 유용한 것만이 유용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환경에 따라 특정한 문법만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유용한 핵산을 조합하는 방법의 수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수가 엄청나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대한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힌두교가 이야기하는 순환적인 우주론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이 시대의 서구인들이 고대 인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동경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시대에 칼 세이건이 이 책의 내용을 수정한다면 아마도 이 부분을 가장 손대고 싶어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거로부터 주어진 정보를 한때는 귀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세대를 거쳐 반복해서 구전되는 동안에 점차 변질되게 마련이고, 결국에 가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퇴색되거나, 아니면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대부분의 정보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오랜 시간 구전되어 내려오며 그 생명력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종교의 경전, 설화, 신화 같은 것들인데 이런 이야기들은 수없이 변화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 사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사실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도 이런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구전이 아니라 활자의 형태로 정확하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면 새로운 세대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반면, 어떤 (사실 대부분의) 책들은 활자의 형태만 남을 뿐 인류의 기억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유전자나 뇌가 아니라 별도의 공용 저장소를 만들어 그곳에 보관할 줄 아는 종은 지구상에서 인류뿐이라고 한다. 이 ‘기억의 대형 물류 창고’를 우리는 도서관이라 부른다.

이제 우리는 ‘기억의 대형 물류 창고’를 더 이상 도서관이라 부르지 않는다. 새롭게 생성되는 정보의 양은 이제 도서관 같은 것으로 보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인간이 유용성을 평가하는 시대를 넘어서 인공지능에 의해 이해되고 해석되는 시대에 이르렀다. 빅데이터의 시대에는 개별 사건의 유용성을 평가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고, 그런 수많은 개별 사건 사이의 비선형적인 관계를 파악하는 인공지능이 활약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의 가치, 기억을 모으고 보존하는 것의 가치는 절대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그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인과율이 초래한 진화의 결과는 얽히고 설켜 있다. 우리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 앞에 스스로를 낮추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언가를 이해한 것 같으면 이해하지 못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사실 인간이 자연 앞에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복잡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스스로 자만해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자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는 것이다. 설사 자연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수백년 후에 지구는, 그리고 인류는 어떤 모습일지 잘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오랜 기억과 역사에 기대어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자연과 다른 인간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복잡하다’는 현실이지만 ‘그러므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는 해석이고 철학이다.

맺는 말

철학책을 읽으면 철학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시를 읽으면 감성적이 되고 과학 책을 읽으면 분석적이 된다. 그런데 어떤 책은 그 내용이 철학이건 과학이건, 시이건, 소설이건 상관없이 종합적인 사고를 하게 된다. 구체적인 어떤 부분이 맞냐 틀리냐를 떠나서, 삶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삶이 가지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종합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은 좋은 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삶의 여러 측면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은이의 생각과 스스로의 생각을 비교하며 어떤 부분이 같고 어떤 부분이 다른지, 그 다른 부분은 내 삶의 어떤 요소에서 기인했는지 생각해 보고 책의 내용과 스스로의 생각 모두를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더욱더 훌륭한 독서의 태도이다.

2020년 8월 독서일기

창세기 설화

개신교 교회와 지도자들은 창세기가 설화로 되어 있다는 지식에 반대하여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로를 차단할 것이 아니라, 이 지식이 없다면 창세기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짧은 평: 창세기를 ‘설화’라는 단어로 해석해낸 책. 창세기 뿐 아니라 성서를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관점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하다!

성서의 시작이면서 태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스라엘의 성립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창세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믿음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을 대할 때 가장 일반적인 태도라면, 이 책을 다른 책들과 다를 바가 없는 동일한 기준으로 읽는 것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일점 일획도 바꿀 수 없는’ 방식으로 읽게 되면 이 책을 일종의 관찰 보고서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책을 모세가 기록했다는 전통적인 이해와 책 안의 연대 기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요셉의 이야기는 모세로부터 최소한 400년이 지난 이야기이고 노아의 이야기나 그 이전 시대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도 훨씬 오래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지금 시대로 생각을 해 봐도, 수백년 전의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상상력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이 바로 역사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일어난 일로 생각한다는 것은 지나친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궁켈은 몇 가지 중요한 분석을 통해서 창세기를 모아서 편집한 편집자가 서로 다른 종류의 전승으로부터 수집된 자료를 솜씨있게 배열하였으며, 자신의 생각에 배치되는 자료라고 하더라도 널리 알려진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포함을 시키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다. 가장 분명한 예라면, 아마도 서로 다른 두 가지 창조 설화를 그대로 실어 놓은 창세기 1장과 2장일 것이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교양 필수 과목인 ‘성서와 기독교’라는 수업을 들을 때, 문상희 교수님 (1998년에 돌아가셨다. 내가 1993년에 수업을 들었으니, 그 분의 거의 마지막 강의를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께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설화의 차이점에 대해서 논하는 숙제를 내 주신 것이 기억이 난다. 누가 보아도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모세오경이라면 3천년을 읽어온 책인데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오면서 이에 대한 의구심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이런 질문은 ‘신약에서 서로 다른 네 개의 복음서가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는 질문이 된다.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단 한 가지 시선과 해석만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어떤 사건이든 그것은 해석되어야 하며, 그 해석은 해석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생명력이 있는 이야기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심적인 가치는 유지된다는 것이 또한 그 생명력의 놀라운 점이다. 그것이 바로 궁켈이 ‘설화’라는 단어에 담은 뜻이며, 시대와 장소에 상관 없이 인간의 삶 속에서 발견되는 원형적인 이야기들이 설화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야기가 바로 창세기인 것이다.

이 책은 궁켈이 쓴 ‘창세기 주석’의 서론을 번역한 것이다. 성서를 깊이 연구하고 싶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주석 전체를 읽고 싶겠지만, 이야기의 상세한 해석보다 창세기 (또는 성서)라는 책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로서는 이 서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지혜말씀으로 읽는 욥기

그러므로 제 잘못된 말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에 관한 생각을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욥 42:6, 저자의 번역 제안)

짧은 평: 욥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지혜서로 해석하면서 이 책의 특징을 잡아낸 점이 신선하다.

욥기 42장 6절을 개역개정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로, 새번역에서는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로, 공동번역에서는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로 번역하였다. 모두 후반절의 내용을 ‘회개’로 번역한 것이다. (NIV, KJV 등의 영어 성경에서도 모두 repent를 사용함) 이렇게 하면 욥기 전체에서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던 욥이 하나님의 연속적인 반문을 듣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원문을 다시 해석하여 “티끌과 재에서 회개”가 아닌 “티끌과 재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티끌과 재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의미하므로, 결국 욥은 하나님과의 질의 응답을 통해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두번째 응답에서 베헤못이나 리워야단에 대한 찬사는, 인간이 그런 존재들보다 못하지 않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욥이 인과응보, 상선벌악, 또는 신명기적 신학에 대해 묻고 따지는 그 행위 자체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패망과 포로됨이라는 역사 앞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현실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닌 우리의 죄 때문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신명기적 해석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이해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욥의 이야기를 통해 교리적인 순종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질문과 항변에 가치가 있음을 말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성경을 관통하는 신학이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룻, 요나, 욥, 아모스 등은 이른바 이스라엘의 정통 신학에서 벗어나 있을지 모르지만, 숨막히는 교리와 기계적인 인과응보에서 벗어난 곳에,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생각과 외침 속에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단순한 논리로 설명할 수 있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을 보게 되는 역동적인 과정인 것이다. 그런 이해 없이 한 곳에 머무르는 신학은 욥의 친구들로 표현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책을 읽을 때 떠오르는 궁금증은 현대 유대교에서는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봄으로써 지금의 내 생각의 지평을 많이 넓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 5월 독서 일기

이번 달에는 모두 13권의 책을 읽었다. 가능하면 다양한 독서를 하고 싶지만 이미 구매한 많은 책들 중에서 ‘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샀지만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위주로 읽고 있고, 그런 의무감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면 일전에 읽었지만 다시 읽을 가치가 있는 책들도 꾸준히 읽어 나가려고 한다.

  1. 소설: 호수살인자, 쇠못살인자, 쇠종살인자 이 세 권은 지난 4월에 읽었던 황금살인자에 이어서 디런지에 시리즈의 나머지에 해당된다. 서구인이 쓴 중국 추리소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이나 사회에 대한 설명이 정확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서양 추리소설의 문법조차도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동서양의 안좋은 점을 합쳐 놓은 셈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추천할 정도는 되지 않는 듯. 양쯔강은 ‘대지’ 3부작 시리즈로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등을 수상한 펄 벅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대지’ 시리즈도 너무 어릴 때 읽어서 지금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작가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서야, 사실 펄 벅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지’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도리어 퇴보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거나 펄 벅이 스스로를 ‘정신적인 동서 혼혈인’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큰 울림을 주지는 못했지만, 온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서양 공부를 하고 돌아온 청년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가족과 이웃의 기대와 역사적인 소명 속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아편에 손을 대고 마는 장면을 묘사할 때는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중국의 근현대사 변혁기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인물로 이야기되는 아Q와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 그러나 그보다 더 그 시대의 중국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2. 역사: 지난달에 시작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4권까지 읽었다. 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이야기이고, 4권은 4.19를 포함한 4월혁명에 관한 내용이다.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치열한 역사 전쟁을 기억하는 면에서 보면, 도대체 어떻게 현대사에 관한, 그것도 이승만 정권에 대한 긍정적인 역사 서술이 나올 수 있으며 그것이 전쟁이라는 단어로 표현될만큼 격렬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국내의 상황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환경과 좀더 긴밀하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그런 방대한 내용을 모두 다룰 수는 없었을 것 같고, 작년에 읽었던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50년대의 내용을 겹쳐서 생각하면 1950년대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초들은 거의 섭렵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인문: 수축사회는 리디북스에서 진행한 메디치미디어 무료 대여 행사 덕분에 읽게 된 책이다. 엄청나게 성장하는 경제를 배경으로 자라온 내게 수축사회라는 개념 자체가 그렇게 와닿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10대 혹은 20대를 이해하기 위해 이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장이 정체된다는 말은 결국 모든 활동이 제로섬 게임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인데, 이런 생각은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문화와 생활을 영위해온 유럽인들 또는 북한 사람들에게 도리어 더 익숙하고 유리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상황에 대한 진단은 같아도 그 대처 방법은 생각의 방향에 따라 정 반대로 나올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인데, 저자가 제시하는 내용들은 그 기본적인 생각의 뿌리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최소한 나 자신은) 거의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의 역전은 수축사회의 저자 홍성국을 포함하여 모두 8명의 저자가 각 분야에서 힘의 역전이라는 주제로 쓴 글을 모아 놓은 책이다. 이 중에서도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부분은 피해자 우선주의로 바꿔라는 이수정님의 글과 수도권 중력에 맞서는 메기시티 구상이라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글이었다. 증거의 오류는 내가 구매할 때 생각했던 데이터증거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책으로서 읽기에는 쉽지 않은 책이었다. 나는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한 데이터에 대한 생각을 주로 가지고 있지만, 저자는 사회과학의 측면에서 특히 설문조사와 관련된 내용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4월 6일에 읽기 시작해서 5월 16일에야 다 읽을 수 있었으니 꽤나 오래 걸린 셈이다. 그래도 읽는 중에 실제로 내가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에 직접 적용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서 어느 정도의 적극적인 읽기가 가능하기도 했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는 아마도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것 때문에 더 유명해진 책일 것이다. 사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에 대해 비교적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내게 그 책을 매우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이 책이 그렇게 마음에 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른 세대가 자녀 세대에게 들려주고 보여주어야 하는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하고 있는 부분은 매우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 실천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공허’ 또는 ‘삶의 의미에 대하여 믿고 있었던 것의 공백’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 공허 또는 공백의 문제가 삶의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할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그 사람이 내 자녀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고.
  4. 경영: 애자일, 민첩하고 유연한 조직의 비밀이라는 이 책은 애자일 경영에 대한 방대한 내용의 책이다. 내가 느끼기에 조금 번잡하게 쓰여진 측면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론에서 시작된 애자일이라는 개념과 문화가 어떻게 경영에 적용되고 활용될 수 있는지를 깊이있게 설명한 것은 분명하다. ‘애자일’하지 않은 조직이 어떤 어려움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애자일’이 필요한 것인지, 이런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한 기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애자일’인 것인지, ‘애자일’ 방식으로 경영을 하면 이런 어려움과 문제를 겪지 않을 수 있는 것인지 등 생각해 볼만한 방향은 여러 가지가 있다. ‘애자일’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행동의 원칙은 (이 책의 첫머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그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고객 중심의 사고방식’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면에서 구체적인 행동 양식보단 사고방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직이 애자일하기 위해서는 애자일을 교육하는 것보다는 애자일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더욱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일거라고 생각한다.
  5. 종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쓴 버트런드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영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불리던 사람이다. 나는 그가 학자로서 이루어낸 업적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책만을 놓고 보면 왜 그를 시대의 지성이라고 불렀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번역이 엉망인 것도 있겠지만… 그 시대에는 지성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의 관점에서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예수의 역사는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이다. 그의 책이 언제나 그렇듯이 읽기 힘들고 (이북이면서도 가독성을 올리기 힘든 편집도 한 이유일 수 있지만), 모호하고 어려운 많은 단계를 지나가야만 간명하게 정리되는 결론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 결론이 중간의 어려운 단계를 충실하게 따라오지 않았더라도 부정하기 힘든 매력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책을 자꾸만 읽게 되는 이유이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에수를 죽음의 자리까지 끌고 간 것은 로마의 잔악함이 아니라 그 정상성(normalcy)이었다.

2020년 4월 독서 일기

이번달에는 모두 12권의 책을 읽었다.

소설

이것 저것

람세스 시리즈를 모두 읽었고,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는 네 번째 책으로 완결이 되었다. 황금살인자는 네 권으로 구성된 디런지에 시리즈의 첫번째 책으로, 중국을 배경으로 관원인 주인공이 각종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물이다.

탕자 돌아오다

앙드레 지드의 (정말) 짧은 소설이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잘 알려진 성서의 탕자의 비유를 도전적으로 다시 쓴 우화라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그가 1907년에 연재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지드의 나이 38세에 쓴 소설이다. (최근에는 작가의 나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아래에 적을 비유의 위력 때문에 읽게 되었는데, 도전적인 비유에 대한 예로서도 훌륭하지만,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을 어떻게 듣고 해석하고 다시 재창조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멋진 예라고 생각한다. 너무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독자가 일정 정도 이상 상상력을 동원해서 열심히 따라가야만 하도록 하는, 그러면서도 그 길이 힘들거나 소득이 없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유도하는 지드의 솜씨는 칭찬할만했다.

비소설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

이 책은 내가 살 것 같지 않은 책 중에 거의 가장 위에 있는 책이다. 그런데 4월 중에 교보문고 전자도서관을 통해 두 권의 책을 무료로 대여해 주는 이벤트가 있었고, 이런 기회에 내가 살 것 같지 않은 책을 대여해서 읽어보기로 하고 이 책을 빌려서 읽었다. 읽고 나서 내가 쓴 평은 이렇다.

이런 책이 인기를 끄는 지금 시대란… 그렇지만 나도 읽으면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무뎌진건가 아니면 작가가 글을 잘 쓴 것인가

타인의 해석

말콤 글래드웰의 신작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베스트셀러는 예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그렇게 서평이 좋지는 않은 것 같다. 그의 전작과 비교해서 이렇게 평이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그의 전작인 다윗과 골리앗이나 아웃라이어같은 책의 인기는 어디서 온걸까? 결국 그 책들이 주는 (또는 준다고 믿어지는) 핵심 메시지가 어떤 것인가가 중요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앞의 두 책은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 또는 평균을 뛰어넘는 상위 1%의 비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에 타인의 해석의 경우에는 낯선 이를 신뢰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작들이 믿을 수 없이 성공적인 사례들을 보여 준다면 이번 책은 믿을 수 없이 어처구니 없는 사례들을 보여 준다. 누가 뭐라도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좋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사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에서 끝나지 않고 잘못된 가정에 기초한 행동 수칙들을 개선해야 한다로 읽어야 할 것이다. 조직 내에 또는 개인적으로라도 이런 잘못된 가정들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 조직 또는 개인에게는 굉장히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권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었으니 이제는 현대사로 넘어간다. (물론 그 중에 들어 있는 일제시대를 다룬 박시백의 35년도 읽어야 하지만, 이 시리즈는 아직 완결이 되지 않았으므로 뒤로 미루기로 했다. 2019년 중순에 나온 5권이 1935년까지를 다루고 있으니 아직 완결되려면 시간이 꽤 남은 듯 하다.) 언제나 역사란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에 의견이 갈릴 수 밖에 없지만, 현대사는 그것이 현대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첨예한 의견 대립이 있을 수 밖에 없는 분야이다. 지금의 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자기 객관화가 어렵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현대사를 일관된 시각에서 꿰뚫는 것이 쉽지 않은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매력적인 책이다. 사실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담아 저술한 것에 비하면 이 책은 대담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덕분에 쉽게 잘 읽힌다는 장점도 얻었다. 이제 1권을 읽은 것이니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긴 했지만, 해방 후 3년의 시간을 막연하게 혼란의 시기라고만 평가하는 많은 책들에 비해서 어떻게 그 시기에 그렇게 풍성한 논의들이 가능했을까 싶을 정도로 주요 사건과 논의들을 잘 정리해 두어서 좋았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자긍심) 때문에 과거 시대를 혼란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비유의 위력

존 도미닉 크로산의 책들은 내게 도전적이고 좋은 내용과 그에 못지않게 읽기 힘든 문체, 이상한 번역으로 기억된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전에 내가 읽었던 그의 책들을 모두 김준우가 번역하고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출판했다 것을 감안하면 그게 작가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번역자에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즐거운 책읽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서 오는 깨달음과 의미들이 너무 분명하기에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사실 국내에 ebook으로 나와 있는 그의 책이 이제 몇 권 남지 않았으니 몇 번 더 이 정도의 고생을 하는 것은 뭐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은 예수가 가르친 비유들을 수수께끼 비유, 본보기 비유, 그리고 도전하는 비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예수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협동하도록 도전하는 비유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 정의를 복음서 자체에 적용하는데까지 나아간다. 전통적인 복음서 해석자들이 들으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이겠지만, 오래된 텍스트를 전통대로 읽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생각을 감옥에 가두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런 종류의 사유를 만나는 것이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배움의 발견

이 책은 읽으면서 참 희귀한 경험을 했다. 책의 절반까지는 정말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읽는 것이 힘들어서 책장을 넘기기로 쉽지 않았다. 그리고 절반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몰입을 하게 되었다. 조울증과 이상한 종교적 신념에서 오는 망상에 빠져있는 아버지, 그리고 거기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적응해 살아가는 가족들, 그 안에서 탈출을 꿈꾸는 아이들… 아버지의 신념이 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는 앞 부분은 정말 읽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혹시라도 이런 종류의 억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성찰하는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지은이가 이제 다시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갈등에 내가 꼭두각시로 이용되도록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심하는 장면에서부터는 좀더 마음을 놓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린 자아. 타라 웨스트우드는 그것을 교육(educated)이라고 불렀다.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읽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아이들을 어떻게 독립적이고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울 것인가에 대한 눈부신 반면교사로 읽었다. 그리고 어떤 환경도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간증으로 읽었다.

독서 일기: 베조스 레터

이 책은 우리 회사의 경영진 및 팀장들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하는 두 권의 책 중 하나이다. 나머지 한 권인 존 도어의 OKR 책도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 지금 당장 도입해서 사용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베조스 레터는 이보다도 더욱 강렬한 느낌으로 기억될 책이다.

어떤 분야에서건 세계 최고가 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우연이나 행운이 많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세계 최고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존이 세계 최고의 상거래 사이트인 것도 맞고 베조스가 세계 최고의 부자인 것도 맞는데, 나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 동안 다른 인물들에 비해 이 인물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런 나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베조스가 이야기한 일과 성공의 원칙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리되지 않은 채 내가 그 동안 생각해 왔던 여러 가지 생각의 단초들이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내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생각을 해 보았는지가 아니라 실행하고 체화했는지이다. 생각을 해 보는 것으로는 아무 변화를 일으킬 수 없고, 실행하고 평가하고 다시 피드백을 얻어서 개선하는 노력이 반복되어야만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회사가 나름대로의 상황과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다름이 다른 전략과 다른 실행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혼자 하는 일이 아닌 이상 원칙이 필요하고 그 원칙은 다름을 넘어서서 적용될 수 밖에 없는 기본이어야 한다. 그 기본은 결국 그걸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독서가 힘을 발휘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독서 일기: 인간 본성의 법칙

올해 들어 지금까지 147권의 책을 읽었고, 5월 이후에는 꾸준히 한 달에 15권 정도의 책을 읽고 있으니 이틀에 한 권 정도의 속도로 책을 읽어온 셈이다. 물론 이 중에는 100 페이지 내외의 짧은 책들도 많이 있고 (주로 범우문고나 살림총서 같은 시리즈물) 장편 소설도 있기 때문에, 생각할 것이 많은 인문 서적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좀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북트리라는 iOS 앱 덕분에 각 책을 언제 읽기 시작해서 언제 마쳤는지도 모두 기록을 할 수 있다)

마이클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은 8월 24일에 읽기 시작해서 11월 17일까지 읽었으니 (물론 그 중에 틈틈이 책을 읽어오기는 했지만) 거의 석 달을 꼬박 이 책에 투자를 한 셈이다.

말이라는 것, 글이라는 것이 항상 그렇지만 적절한 정도를 찾는 것이 참 어려운 법이다. 너무 짧아지면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너무 길면 장황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제목은 (특히 법칙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레토릭 같은 면이 있는데, 그 법칙이 세가지, 다섯가지, 열가지 정도까지는 그럴 듯 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이 책에서처럼 18가지나 되면 그 법칙을 외우는 것도 힘든 상황이니 법칙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에 비하면 꽤 장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열 여덟가지의 법칙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사용하는 기술 방식은 각 법칙마다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유명한 인물의 사례를 들고 이로부터 각 법칙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사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하는 방식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에 내게는 꽤 익숙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 책이 꽤 긴 책이기도 하지만 (거의 63만자인데, 이 책 바로 전에 읽은 <우울할 땐 뇌과학>이 약 18만자 정도 되니 이런 책 세 권이 넘는 분량이다) 이런 기술 방식의 단순함 때문에 빠르게 읽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솔직히 책의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서로간에 잘 들어맞지 않거나 지나치게 끼워맞춘 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어서 모든 부분에 동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면에서, 특히 모든 사람이 인간의 본성을 배우는 학생이어야 한다는 전제에 있어서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사람은 복잡한 존재이고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에 드는 단순한 내용을 좋아하기 쉽지만 진실이란 항상 그것보다는 더 복잡하고 다층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법칙이라는 말이 주는 단순함과 가벼움에 비해 그 내용은 훨씬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자세히 읽고, 그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이 책에서 제시하는 제안을 따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리라 생각한다. 이 책을 쓴 마이클 그린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일단 평생동안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이상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해하고 배워야 한다는 전제를 동의하기만 한다면, 그 다음은 필요할 때마다 한 번씩 펼쳐보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독서를 진지하고 세밀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반대로 가볍고 빠르게 읽는 편이다) 곱씹고 생각할 부분이 많이 있는 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