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대한민국의 교회에 대한 생각
치킨집과 교회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치킨에 관한 한 우리 나라만큼 다양한 치킨들이 경합하는 나라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입하기도 쉬운 편인데다가 수요도 많기 때문에 가격이건 맛이건 아니면 다른 어떤 점이든 특별한 점이 있어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만 하다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꽤 있는 시장(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뛰어들고 있는 것이고, 대한민국 어디에서 살아도 치킨을 먹고 싶다면 최소한 몇 가지의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치킨집은 자영업자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고 경쟁도 심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수준이 상향 평준화될 수밖에 없다.
교회 역시 기본 구조는 창업이 쉬운 자영업자이다.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은 사실 일부 큰 교단을 제외하면 어려운 일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교단은 잘 구별을 못하니 이건 큰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신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독교인의 수는 적지 않다 (물론 치킨을 좋아하는 사람 수보다는 적을거 같다). 교회의 수가 많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점은 아닌 것이, 다양한 교회가 있기 때문에 취향에 맞는 교회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꽤나 높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가 멀리 있어도, 셔틀 버스로 친절하게 모시고 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가 많다보면 전체적인 퀄리티는 상향 평준화될 가능성이 높다.
교회의 특징
치킨집과 교회의 결정적인 차이는 정치적인 영향력이다. 사실 치킨업주협회 같은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협회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질 확률은 매우 낮다. 그에 비하면 교회의 협회라고 할 수 있는 교단 아니면 교단 연합 단체 같은 것들은 아주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영향력은 여러 가지 요소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큰 것이 교회의 사회적 역할이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단지 특정 요일에 한두번 방문하는 종교 시설이 아니다. 이른바 X세대인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1980년대 정도에는 교회의 문화적인 수준이 다른 곳들에 비해 높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노래, 피아노, 기타, 드럼, 인형극, 연극 등) 교회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교회가 단순히 예배 장소가 아니고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만 인간 관계를 형성해도 다양한 삶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하고만 모든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교회도 동일한 측면에서 그 안에만 있어도 삶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을 채울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 그러니까 산업화 세대의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삶의 공동체이다.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도 교회를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평생 동안 사귀어온 친구들이 있고 삶의 모든 부분을 나누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점이기는 한데, 교회는 이 분들의 심리적 안정, 복지, 건강 등 다양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기관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이 기관의 운영은 상당 부분 신자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지니 일종의 품앗이 같은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은, 사회의 대부분의 기관들이 빠르게 인터넷으로 그 창구를 바꾸고 있을 때 여전히 오프라인 중심의 관계성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는 것이 교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2012년 대선을 기점으로 해서 노년 세대의 상당수가 카톡에 익숙해지기는 했다) 이런 공동체성과 오프라인 모임의 특징이 세대간 대결이라는 정치적인 구도 속에서 특정한 정치색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 지금 한국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의 실체이다. 동일한 채널에서 동일한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한 쪽으로 의견이 강화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반대로 이야기해서, 교회 안에서 그런 끈끈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치킨집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생각날 때 주변에 있는 치킨집에서 치킨 시켜먹듯이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서 잠시라도 종교적 분위기를 느끼고 오는 것이다. 이왕이면 큰 교회가 좋은 것이, 귀찮게 이름과 전화번호 적고 주중에 연락오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기 때문이고, 목사님과 눈이 마주치는 것보다는 그럴듯한 직위를 가진 잘 나가는 분들을 우연히라도 만나는게 더 기대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사님이 마음에 안드는 말을 하거나 운영에 있어서 잘못된 부분이 보이거나 하면 교회를 옮기는데도 별 거부감이 없다.
위기 상황에서의 교회
이런 상황에 비해 천주교는 훨씬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직접 체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레시피가 상당히 표준화되어 있고 중요한 의사 결정은 본사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다. (잘 모르니 이 부분은 짧게 쓰는게 맞겠다)
평상시의 상황이라면, 그래서 개인들이 최대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교회가 장점을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큰 위기이다. 그래서 이런 위기가 되면 위기 대응 능력이 드러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영세업자의 모임이기 때문에 일사분란한 대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위기 대응 능력이 큰 것처럼 천주교는 이런 위기 상황에서 더 일관적이고 상식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것과 대조되는 지점이다. 특정 교회의 문제가 교회 전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는 표현이 들어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임을 고백하는 이 고백이 교회의 고백이라면, 적어도 일부 교회의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은 스스로의 신앙 고백을 부정하는 내용일 수 있다.
최소한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교회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심지어는 신학적인 작은 문제에 있어서조차) 통일된 의견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공동체이든 관계없이 적용될 수 있으며, 교회의 경우 그 사실이 교회됨의 (거의) 근본적인 특징이라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긍정적으로도 또는 부정적으로도 발현될 수 있다는 면에서 지금 교회가 보여주는 위기 대응 능력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맺는 말
마르틴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을 기반으로 천주교에서 분리된 기독교는 그 영세업자성을 버릴 수 없다. 그리고 큰 위기가 닥쳐 왔을 때 그 영세업자성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되는 것을 2020년 대한민국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이 갖는 장점을 생각하고 논하기에는 아직 교회는 위기의 시작점에 서 있을 뿐이고 지금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래도 교회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은 통일된 생각으로 국난을 극복해야 하는 시기도 있지만, 다양한 생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작은 씨앗이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필요할 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춘궁기에도 파종할 종자씨는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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