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과 진화론 - 어떤 짧은 논쟁

개인적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 논쟁이 과학이란 어떤 것인가 혹은 신념이란 어떤 것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논쟁은 과학의 문제가 아닌 신앙의 문제일 뿐이지만, 이 신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비과학이 과학을 핍박하는 혹은 믿음이 이성을 지배하는 하나의 예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 전 트위터를 통해서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화석에 대한 창조론자들의 태도는 0이 커져서 1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 사이에 0.5가 있다고 얘기하면 0.5에서 1의 중간이 없다고 주장하고 0.75라고 얘기해 주면 또 그 사이의 중간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장난을 어디까지 맞춰줘야 하는가?
이렇게 답 멘션을 달았더니
@non_believe @qwmp 진화를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인 변화’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 아닐까요?
이런 답변이 다시 달렸다.
@lordmiss @qwmp 화석에 대한 반응이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우리의 어릴 적 모습이 자라서 현재 모습이 됐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요? 중간중간의 사진만 있을 뿐 그 중간 단계는 자신이 증명할 수 없는데 과연 어떻게 어릴적 자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진화로 종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긴 시간을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의 변화라는 큰 사건을 설명하는데 있어 눈에 보이는 진화는 너무나 작은 변화이기 때문에, 매우 긴 시간 동안 작은 변화들이 쌓여서 큰 변화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진화의 과정 중에 어떤 종류의 급격한 변화가 있어서, 짧은 시간에도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긴 시간이라는 전제는 필요없어진다. 급격한 변화를 인정한다면 중간종의 존재 역시 보여줄 필요가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즉 종의 다양성이 작은 변화들이 무수히 반복되어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중간종의 존재는 반드시 보여주어야 하는 일이 된다. 더군다나 현재 그 진화의 과정이 멈추었다고 볼 이유가 없다면 지금도 그런 변화들에 의해 종과 종 사이의 중간 상태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종과 종 사이의 중간종들은 생존에 적합한 형태가 아니므로 쉽게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종 간의 변화는 연속적인 변화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긴 시간이라는 전제도 필요없어질 뿐만 아니라 중간종의 존재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진화론자가 창조론자를 공박하기 위해 해야 할 말은 중간종 보여줬으면 되지 왜 또 보여달래? 가 아니라 중간종 안 보여줘도 아무 문제 없거든?이 되어야 한다. 창조론자들 역시 이 부분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론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보기에는 큰 의미가 없는 공방일 뿐.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과학적인 사고, 혹은 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산다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산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은 못 믿을 것 천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