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의 대각선>을 읽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퀸의 대각선>이라는 소설에서, 개인의 뛰어난 역량이 인류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믿는 모니카, 함께 뭉친 집단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믿는 니콜, 두 명의 주인공이 호적수가 되어 평생 대결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의 소설은 항상 재미를 중요하게 여겼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소설은 개인의 힘과 집단의 힘이라는 정 반대의 신념을 가진 두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을 그 주요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전 세계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들을 넘나든다. 체스 챔피언들의 대결, IRA 무장 투쟁, 헤이젤 참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9·11_테러와 이란 핵 위기까지, 전세계인들의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사건들의 배후에 주인공들을 참여시킨다.
작가는 독자들이 어느 한 쪽의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을 원했을지 모른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입장이 제시되면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니까. 그런데, 사실 작가는 두 주인공을 동등한 시점에서 다루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한쪽 편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스에서 폰을 이용해 압박하는 전술과 퀸을 파괴적으로 사용하는 전술을 대립시킨 것은 (내가 체스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균형이 맞는 것일 수 있지만, 개인의 뛰어난 역량을 믿는 모니카가 MI5와 CIA에서 활동하고 집단의 힘을 믿는 니콜이 IRA와 KGB에서 일한다는 설정은 어느새 균형을 잃고 있다. 애초에 니콜이 먼저 모니카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으로 두 사람의 대립이 시작되기도 했고.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지점은, 작가가 이야기를 서술하는 관점이 두 주인공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소설이 원래 주인공에게 집중하는 것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얼음과 불의 노래>에서 주인공일 것 같은 에다드 스타크가 초반에 죽는 것처럼, 산만하게 엮이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큰 흐름을 보여주는 방식의 소설들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길게 보면 이 소설도 얼음과 불을 대표하는 두 명의 주인공 이야기이다.) 두 개의 서로 다른 이념을 대표하는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한 명의 전형적인 인물이 어떤 이념을 대표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이미 작가가 두 흐름 중에 어떤 흐름에 경도되어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립적인 스토리를 읽으며 드는 생각은, 세상이 이렇게 뚜렷하게 나뉘는 경우는 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창조적인 개인에게서 나올 수도 있고, 집단의 힘에서 나올 수도 있다. 둘 중 하나가 정답이라고 믿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나는 세상 모든 일에 10:0은 없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문제는 기껏해 봐야 6:4냐 7:3이냐 정도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으로 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은 잘못되었다고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비슷한 수준에서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근사하게 말해도 좌익과 우익은 각각 일부의 진실만을 대표할 뿐이며, 진보와 보수, 개인과 집단, 정의와 사랑, 내향성과 외향성, 이런 끊임없는 대립항들이 결국은 섞이고 합쳐지면서, 그러니까 정반합의 과정으로 변화해 간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노장 사상과 유사한 지점일 수도 있겠다.
소설은 긴 두 주인공의 삶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고 열린 결말의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 이미 세상에 대한 파급력을 이미 잃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수십년 전에 끝난 것이고, 그게 바로 사람의 인생을 표현하는 가장 그럴듯한 해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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