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널리티

두 세계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온전히 존재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세계의 경계에 있는 주변부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 non-being 처럼 느낀다. 실존적 무 nothingness 는 둘 이상의 지배 세계의 관점에서 기인한 비인간화의 근원이다. (83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예수가 새로운 주변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는 것은 주변부 사람의 마음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또 새로운 주변부 사람의 마음이 양자 부정과 양자 긍정의 사유방식을 통해 작동한다면, 이 사유 방식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해석학적 원리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 그는 두 세계 사이에 살았던 아웃사이더로, 십자가에서 백성에게뿐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거부당했다. 그는 확실히 어느 세계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은,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에 있던 사람이었다. (124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기대하지 않았던 책에서 굉장한 보물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가 이 책을 보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내가 저자에 대해 또는 그가 펼치는 주제에 대해 과문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제목과 앞쪽 몇 페이지만 읽어보고 (리디북스에서는 대부분의 책에 대해 미리보기를 지원한다) 이 책을 구매한 것은 참 잘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쓴 이정용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자신을 표현할 때 "나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아시아인 이상이며 아시아인이기에 미국인 이상이다"라고 쓰고 있다. 두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껴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기 힘든 과거일수록 이런 경험이 흔하지 않은 것이었을텐데 그나마 최근에는 이동의 거리가 넓어지면서 이런 주변부성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나 역시 짧지만 외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외국에서 살아본 또는 살고 있는 경험이 아니더라도 주변성을 경험하게 되는 일은 은근히 많다. 사람은 끊임없이 패거리를 만들고 거기에 소속되려고 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패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구분한다는 것이고,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패거리의 행동 양식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모가 큰 패거리일수록 이런 구분 방법이 정교하고 강력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중심부와 주변부의 갈등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기에는 너무 커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런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느냐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이 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행동에 대한 지침이 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지은이가 주창하는 주변성 신학 역시 기독교를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는 시도이다. 그리고 그 시도는 대단히 유효한 일일 수 밖에 없다. 특히 2020년의 대한민국 교회는 지은이가 말하는 이 대목을 귀 기울여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힘과 위엄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강력하게 한 것이 사실 그의 약함이었고, 그를 주의 주로 만든 것이 겸손이었음을 잊었다. 예수의 종 됨보다 주 됨에 더 관심을 갖고, 예수의 죽음보다 부활에 더 열광했다. 예수는 중심 집단의 학자들에 의해 형이상학적 사색의 대상이 되었고, 특권층 교회 사제들에 의해 칭송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가 추구하는 중심에 예수가 있기를 원한다 해도, 우리가 추구하는 중심은 진정한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중심이고, 권력과 지배를 추구하는 중심이다. 그래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너의 생각이 사람으로부터 왔다"라고 했다. (133페이지, 리디북스 기준)

그렇다면 지은이가 주장하는 주변성 신학은 어떤 삶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가 말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은 중심부 가치 이데올로기와 투쟁하며 사는 창조적 삶에 대한 비전이다. 예수가 자신의 백성에게 거부당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거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 거부를 극복해낸 것이다.

이 극복은 고통을 해소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직면해 싸운다는 뜻이고 그 싸움을 사랑과 섬김으로 이겨냈다는 뜻이다. 이 싸움은 적응하고 익숙해질 일이지만,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믿음 없이는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그 싸움을 사랑과 섬김으로 이겼다는 것을 믿어야만한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예수 자신이 주변부 사람이었기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주변부 사람들에 의해 평가되고 쓰여지고 살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신학은 주변부적이며 자서전적일 수 밖에 없다. 주변성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 주변성을 극복하면서 어떻게 뿌리깊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거하고 모든 사람을 화합시킬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교회가 중심부의 매력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회중들이 위계 구조적 특권의 사다리를 오르도록 꾀어내는 것은 종교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중세 기독교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는 끊임없이 예수를 따라 스스로의 주변성을 깨달아야 하고, 사랑과 섬김이라는 방법으로 중심부에 들어가려는 욕망과 싸워야 한다. 천국은 모든 사람의 개성이 그대로 하나님의 본성과 합일되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중심이며 모든 사람이 주변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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