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인가 나비인가

들어가는 말: "엉덩이가 가벼운 게 흠이야"

한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김 박사는 다 좋은데 엉덩이가 가벼운 게 흠이야." 내가 한 직장에 오래 머문 편은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당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직장을 옮기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며,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늘 뒤따랐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선배는 이런 조언을 건넸다. "한 회사에서 길게 근무하며 신약 발굴의 시작부터 성공까지, 전체 과정을 '긴 호흡'으로 경험해 봤으면 좋겠어."

물론 전적으로 동의한다. 과제의 수직적 흐름을 완주하고 그 과정에서의 수평적 상호작용을 깊이 이해하려면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의 이력은 바꿀 수 없는 기록이다. 나는 이 기록을 부정하기보다, 나의 이직 결정들이 남긴 데이터들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했다. 각 결정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경험들이 어떤 맥락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변화의 속도와 조직의 관성

기술 스택은 눈부시게 변화하지만, 조직의 인사 시스템과 직무 설계는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제약사 연구소에서 '코딩하는 연구원'을 평가하고 관리하는 모델은 여전히 정립 중이다. 기술의 흐름을 따라 진화하고 싶어도, 앞서간 선임자가 없다면 조직 내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은 고독하고 고단한 과정이 되기 쉽다.

최근 많은 조직이 AI Literacy를 강조하지만, 변화를 선도하는 그룹과 이를 수용하는 그룹 사이의 속도 차이는 필연적이다. 조직은 본질을 지키며 안정성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이 있기에, 속도와 안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기술의 속도에 맞춰 변화를 택할 것인가, 조직의 안정에 발을 맞출 것인가의 문제는 정답이 없는 '선택'의 영역이다. 각자는 자신의 성향과 역량에 맞는 자리를 선택하고, 그 결과로 증명하면 될 뿐이다.

연구와 개발, 그 사이의 심연

스타트업에서의 시간은 연구의 가치를 어떻게 '사업적 결과'로 실현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게 해주었다. 개인적으로 누구나 인정할 법한 커다란 성공을 완수하지는 못했기에, 당시의 경험은 '실존적인 고민과 좌충우돌의 기록'으로 남았다.

연구원으로서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내게, '내가 잘하는 기술'과 '사업적 성공'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인내심을 갖고 평생을 투자해 그 심연을 메우기도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이들이 그 심연에 잡아먹히곤 한다.

이 간극을 줄이기 위해 기술을 더 날카롭게 벼리거나, 사업 목표를 현실적으로 수정하거나, 혹은 생존을 위해 점진적인 개선을 택하는 등 다양한 전략이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은 환경에 따른 선택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상황에서 최대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기술 부채와 리더의 선택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이 끊임없이 등장할 때, '기술 부채'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빠른 증명을 위해 택했던 임시방편들은 시간이 지나면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이 부채를 해결하려면 막대한 자원이 필요하지만, 경영진은 대개 '부채 해결'보다는 새로운 'R&D 항목'에 자원을 배정하길 선호한다.

실무자는 부채 해결을, 리더는 새로운 성과를 지향하는 구조적 긴장감은 어느 조직에나 존재한다. 코드 베이스의 완전 재작성과 점진적 개선 사이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소프트웨어 프로젝트처럼, 이 역시 정답이 없는 줄타기의 연속이다.

메뚜기인가, 나비인가

한 자리에서 꾸준히 가치를 만들어내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열 번 찍어 나무를 넘기는 끈기는 분명한 미덕이다. 다만, 나처럼 '엉덩이가 가볍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에게도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벌과 나비가 없다면 생태계의 순환은 멈춘다. 여러 조직을 거치는 이들이 메뚜기처럼 자원을 소모만 한다면 문제겠지만, 벌과 나비처럼 이 조직의 전문성과 저 조직의 경험을 연결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양한 조직의 문제 해결 방식을 경험하며 얻은 유연한 시각은, 서로 다른 분야의 장점을 결합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싹트게 하는 '꽃가루 매개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맺으며

과도한 일반화는 경계해야 한다. 내 경험이 모든 연구자의 케이스를 대변할 수는 없으며, 사례를 귀납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놓친 디테일이 가장 중요한 맥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분석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내 커리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나만의 가치를 설득하는 것이 결국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신의 커리어를 스스로 분석해 보며 장단점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결국 우리는 타인과 함께 일하며 가치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에, 서로의 장점을 어떻게 결합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