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링크: https://ridibooks.com/books/1570000176
출판일: 2020년 11월 11일 (전자책)
부디 맛있게 잡수시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십시오.
인간은 사랑해도 외롭고 사랑하지 않아도 외롭습니다. 사랑을 받아도 외롭고 사랑을 받지 못해도 외롭습니다. 그것이 인간 존재의 본질입니다. 저는 이 책이 그 본질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데에 미약하나마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당신이 외로워도 외롭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하기 위하여.
정호승 시인은 열 세권의 신작 시집과 천 편이 넘는 시를 발표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아무리 지금 시대가 시의 시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신작 시집을 구입하지 않은지 20년이 넘었고 그저 어릴 때 읽고 좋아했던 시들을 다시 떠올리면서 시선집을 한 두 권 보는 것이 전부이지만 정호승 시인의 시만큼은 어디서든 읽고 느끼고 생각해온 터이다.
시인 중에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시어가 나와 맞는다고 생각하는 시인들이 몇 명은 있는데, 윤동주, 정현종, 서정윤, 정호승 같은 시인들이다. 윤동주는 나의 삶을 지배하는 시인이니 그렇다고 해도, 정현종 시인은 <섬>, 서정윤은 <홀로서기> 한 편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정호승 시인은 좀 다르다. 그의 시들은 거의 모든 시가 (시인이 들으면 기분이 나쁘실 수도 있지만) 내가 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내가 시를 쓴다면, 아니 잘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꼭 그렇게 쓰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뽑은 60편의 시에 이야기를 붙였을 때, 한편으로는 '시에 굳이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사족일 뿐이다'라는 생각과 '내가 받았던 느낌이 이야기를 통해 확인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동시에 일으키기도 했다. 책을 사는데는 주저함이 없었지만 이렇게 교차하는 생각 때문에 독서는 그렇게 순탄하게 나아가지만은 않았다. 책의 길이로 봤을 때 내가 집중해서 읽으면 한두시간이면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양이었지만, 실제로는 다 읽는데 2주일 가깝게 걸렸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기보다는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시인의 삶은 윤동주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윤동주가 요절하지 않고 7~80년을 살았다면 그의 인생에도 한두개의 얼룩쯤은 남았을거라는걸, 아니 그보다 훨씬 상상하기 힘든 방식으로 내가 바라는 삶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삶과 시어가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그걸 시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과도한 일인지 잘 이해하고 싶으면서도 내가 사랑하는 시인들 중에 한 명쯤은 그런 위치에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게다. 윤동주에게 그런 위치를 부여해 놓고, 다른 모든 시인들을 그런 눈으로 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처럼 시를 추상화된 삶과 연결지어 생각해 왔던 것이 내가 시를 읽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내 사춘기를 지배한 <홀로서기>의 서정윤이 체벌이나 성추행과 같은 논란 속에 교단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이런 시와 시인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 같다.
정호승 시인은 그에 비하면 그의 시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기대하는 바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도리어 그의 시를 읽는 것에 방해가 될까봐 두려워서였을수도 있고, 그렇게 시인의 삶에 신경을 쓸만큼 여유가 없이 살아와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시인의 생각을 산문으로 맞이하고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가 마음에 꼭 들었던만큼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다.
기자로 살아가면서 시를 쓰는 1950년 대구 출신의 정호승과 1970년대에 서울에서 태어나 과학자로 살고 있는 나 사이에 특별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를 넘나드는 그의 종교적인 세계와 나의 종교 세계 역시 공통점이라는게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 마음으로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내 부모님 또는 삼촌 또래의 친척 아저씨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으로 책을 읽어갔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눈물을 흘리시는 하느님'을 이해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결국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벽이었다. 시의 이해는 결국 문화적 차이를 먼저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호승의 가장 유명한 시 중의 하나인 <수선화에게> 시에 보면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구절이 있다. 시인이 이집트의 한국어과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할 때, (대부분이 무슬림일 것이 분명한) 학생들이 "신은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일화 중에 나오는 이 말을 들으면서 시의 이해는 결국 문화적 차이를 먼저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는 말이 그 이집트 학생들에게 뿐만 아니라 지금 그의 글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때 나는 1970년대의 모든 시인들을 대신하여 김지하 시인이 고통의 십자가를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치 그의 희생에 의해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늘 빚진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김지하 시인에게 감사와 부채 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말하는 감사와 부채 의식이 바로 내가 이한열로 대표되는 나와 동시대의 운동권 선후배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구부러진 등을 본 아들의 이야기인 <못>에서 결정적으로 감정의 동화가 일어나고 말았다. 시인의 말처럼 '어머니'를 노래하는 시는 많지만 '아버지'를 노래하는 시는 많지 않다. 그리고 '어머니'는 많은 상징이 있고 떠올려지지만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제는 주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 구부러진 못인데, 그 구부러진 못에서 아버지를 떠올린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내 아버지도 그렇게 세월의 무게를 견뎌오셨고, 이제 나도 그 '세월의 무게'가 무엇인지 조금은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구부러진 못은 펴지지 않고, 내 허리가 굽을 때가 되어서야 구부러진 못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래.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대구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떨까. 시인이면 어떻고 과학자면 어떨까. 사람이면 다 외로운 것을. 외로워서 사람인 것을. 그렇게 외로운 사람들이 손 맞잡고 어깨 기대고 사는 것이 삶인 것을. 외로운데 외로운걸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게 바로 시인이 이야기한 '마음이 가난한 자'이리라. 마음이 가난하기에 어떻게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큰 차이보다는 작은 공통점에 기뻐하고 감동받고 위로받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작은 공통점을 노래하는게 바로 시인의 역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