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윤의 <홀로 서기>
1984년에 출간되어 사춘기를 보내고 있던 내 마음 속에도 수많은 파문을 만들어냈던 바로 그 책. 나도 300만명 중의 한명이었다. 아마도 이 책을 산건 1987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네.
그래도 나는 어릴 때 시집을 꽤나 읽었고, 윤동주, 김소월, 한용운 같은 시인은 물론이고 서정주, 김춘수, 정현종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나와 좀더 가까운 시대의 시인으로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도 인기였고, 좀더 시간이 지나서 안도현 시인도 많은 기억을 남겼지만, 윤동주를 제외하고 내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시집은 이거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제 더이상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고, 나는 아예 종이책을 거의 남겨두지 않고 전자책으로 이주를 마무리했다.
2014년에 시인이 제자 성추행 사건으로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져서 '이 책을 마음에서 지워야겠다' 정도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정말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제3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부분이고,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회색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어두움을 어두움으로 불러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교보문고에서 이 책이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400원이다.
이 책 뿐만 아니고 가장 최근에는 2023년에 새로 출간한 책이 있는걸 보면, 이제는 다시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한 것 같다.
5400원(의 일부)을 그에게 주는 것이 맞는지의 고민은, 내 영혼에 깊숙이 박혀 있던 책을 다시 꺼내오는 흥분에 간단하게 밀려 버렸다. 그리고 이 시집의 첫 페이지에 실려 있는 '사랑한다는 것으로'를 읽는 순간, 거의 40년은 되었을 과거의 감정이 다시 마음을 찾아왔다. 그 시절 내 삶의 구체적인 정황은 이제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시절의 감정은 생생하게 돌아왔다.
그 시절의 감정이 돌아오는 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그 감정에 흔들릴만큼 순수하거나 가볍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도 그 감정을 조용히 관조하는게 그리 생경하지는 않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으며 돌아온 감정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들과 연결된다. 그들은 소설 속의 인물이나 오래전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같은 시대를 호흡하며 살고 있는 나만큼이나 평범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래도 그럴싸하게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아마 그들도 나만큼 혹은 나보더 더 열심히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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