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andot 음반 감상기 - 닐손/스테파노/프라이스/61년 빈 실황
바로 이 음반.
닐손의 투란도트와 디 스테파노의 칼라프라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 조합. 게다가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류를 들을 수 있다. 지휘는 Molinari-Pradelli가 맡았는데, 이 지휘자가 카라얀이나 세라핀 같은 특급 지휘자는 아니지만 5-60년대의 시대를 풍미하던 많은 가수들을 데리고 많은 음반을 남긴 것을 보면 오페라에 있어 특별한 실력을 발휘하던 지휘자임은 분명하다. (10년 전 페라하에서 활동하던 당시에 나를 포함한 많은 동호회 회원들에게 이 지휘자는 Erede나 Votto 같은 지휘자와 함께 “훌륭한 가수들을 등용하여 평범한 레코딩을 남긴 지휘자” 중의 하나로 평가받곤 했는데, 지금은 사실 그렇게 저평가될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정도의 진용에 빈 슈타츠오퍼라면 매우 훌륭한 진용이 아닐 수 없다.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류는 여러 명의 류 중에서도 단연 상위에 놓을 수 있을만큼 훌륭하기 그지없다. 메트 실황 영상의 레오나 미첼과 더불어 가장 류 다운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
디 스테파노의 칼라프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보인다. 실황 녹음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음반에서 스테파노는 등장 순간부터 상당히 강하게 노래를 부르며, 끝까지 이런 기조를 유지한다. 낭랑한 (전형적인 리릭 테너의) 목소리로 50년대 칼라스와 함께 기적적인 레코딩들을 여럿 남기고, 60년대에 드라마틱 테너로 전향을 하는 중간기라고도 볼 수 있는 61년도의 레코딩이기도 하고, 칼라프가 워낙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야 하는 어려운 역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출중한 결과물을 남긴 스테파노인만큼 전반적으로는 칼라프 역시 열정적으로 잘 소화해 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스테파노의 최대 약점은 고음 영역에서 공명되지 않은 소리를 쥐어짜는 듯한 느낌으로 부른다는 점인데 (이 부분에 대해 파바로티는, 자신이 스테파노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에게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부르다가는 오래 노래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칼라프를 부를 때 고음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과시해야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만큼 풍성하고 강력한 고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분명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투란도트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수수께끼는 셋, 삶은 하나” 부분에서 그의 하이 C는 사실 좀 듣기 괴로울 정도이다. 코렐리나 파바로티의 작렬하는 짜릿한 하이 C가 그리워진다. 그러나, 전반적인 면에서 스테파노는 대단히 훌륭한 노래를 들려주고 있으므로, 그의 고음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도밍고의 삑사리도 용서받지 않았는가!) 이 음반을 듣고 매우 만족할 것이 틀림없다.
사실 이 음반을 들으면서 스테파노와 가장 많이 비교하게 된 가수는 바로 호세 카레라스이다. 카레라스는 한때 “스테파노의 재래”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니, 두 가수는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클래식의 리뷰에서 황지원씨는 카레라스를 “신비한 면을 가진 칼라프 왕자로서 제격”이라는 평가를 한 적이 있다. 이 음반의 스테파노는 이런 면에서 보면 “신비함” 보다는 “열정”을 떠올리게 되는 연주를 해 주고 있으며, 카레라스의 진지함이 음반 쪽에 더 어울린다면 스테파노의 열정은 연주회장을 뜨겁게 달굴 수 있는 힘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음반의 백미는 타이틀롤을 맡은 비르지트 닐손이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투란도트로 알려져 있지만, 최소한 내게는 그녀의 다른 음반들에서의 노래가 그 정도로 뛰어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 음반에서의 닐손은 다른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투란도트들 (심지어 자신의 다른 녹음들)을 간단하게 뛰어넘는다. 첫 등장에서부터 그녀의 소리는 간단하게 모든 극장을 채우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다. 마치 “이제 이 오페라가 시작됩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고음에서의 충만한 기백은 말할 것도 없고, 저음에서조차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실황에서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잉게 보르크, 조운 서덜랜드, 카티아 리치아렐리, 몽세라 카바예, 에바 마튼 등 투란도트로서 뛰어난 녹음을 남겼거나 좋은 실황 영상물을 남겼던 어느 소프라노도 이렇게 완벽한 투란도트를 보여준 적은 없었다!! 한 목소리 하는 레온타인 프라이스마저 그녀와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그저 불쌍한 노예일 뿐이다.
이 음반의 맨 뒷편에는 스테파노의 아리아가 몇 개 실려 있다. 이 음반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매의 포인트는 역시 스테파노라는 뜻일게다. 스테파노의 칼라프는 이 음반을 포함하여 둘 뿐인데, 나머지 하나는 AM 라디오를 훌륭한 음질로 생각하게 해 주는 극악의 음질로 유명한 만큼 이 음반의 홍보 포인트는 스테파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음반을 모두 듣고 난 후에는 생각이 확 바뀌게 될 것이다. 이 음반의 진정한 주인공은 (그래야 하는 대로) 바로 투란도트 역의 비르지트 닐손이기 때문이다. 닐손 이후 많은 가수들이 이 역에 도전해 왔고 일부는 좋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과연 이 음반에서 보여준 닐손의 모습을 능가할 수 있는, 아니 이와 비슷한 정도의 성과만이라도 거둘 수 있는 가수가 나올 수 있을지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