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7 한국교회 연합예배에 대한 생각

나는 이미 내 블로그에 실린 몇몇 글 (그리스도인의 본질… 증오가 아닌 사랑, 2024 파리 올림픽 -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의 생각)에서 동성애에 대한 내 생각을 적은 바가 있다. 그런데 최근에 1027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기도회라는 행사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고, 이 집회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차별금지법 반대에 있으며,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인사들이 여기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27 연합예배에 대한 사실들

이 행사의 홈페이지에는 이 행사의 배경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동영상들이 많이 게시되어 있다. 모든 생각을 다 정리할 수는 없지만, 내가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다.

  • 대한민국은 지난 100년간 건국, 전쟁 극복, 경제와 문화 발전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 이 모든 것은 한국 교회 성도들의 눈물과 기도의 결과이다.
  • 지금 한국 교회는 차별금지법 제정, 젠더 갈등, 마약 중독 등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 지난 7월 18일에 대법원은 동성커플의 동성 파트너에게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부여하는 판결을 내렸다. 차별금지법의 통과도 시간 문제로 보이며, 결국 동성 결혼이 합법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 점잖고 조용한 활동만으로는 대한민국 사회를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대형 집회가 필요하다.
  • 이런 도전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해야 한다.

구체적인 활동 내용도 제시가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차별금지법 반대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약속들이 포함되어 있다.

  • 저출생 고령화 해결: 교회 시설을 아이 돌봄 센터나 방과후 학습 공간으로 제공하는 것을 포함하여 청년세대의 결혼과 출산을 위한 정책에 참여
  • 통일과 통일 이후 사회 통합 준비: 북한 이탈 주민의 정착과 안정적인 생활을 돕는 활동
  • 기금 조성: 200억의 기금을 조성하여 위의 활동에 사용
  • 헌혈 운동을 통해 만성적인 혈액 부족 문제 해결

보수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보수 기독교와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분들도 동참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기존의 보수 기독교가 주도하던 광화문 집회와 차별성이 있다는 점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2020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나 몇몇 기사들 (기독교인 42% “차별금지법 찬성”, 모두가 차별금지법 반대? 과대 대표된 한국교회 목소리 < 다시 차별금지법 앞에 선 개신교)을 보면 차별금지법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팽팽하게 갈리는 것 같다. 다만 기독교계에서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에 비해서 일반 대중들이 이 법의 주요 내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는 죄악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처벌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대체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보호되어야 하는 표현의 자유과 허용할 수 없는 증오 표출은 자칫 경계가 희미해질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한국에서 이 경계의 희미함이 문제가 될 소지는 상대적으로 낮다고 보인다. 예수님이 보여준 이해하기 힘든 포용이 차별받는 사람들을 향했다면, 그의 이해하기 힘든 분노가 종교와 사회 기득권층에 집중되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 바른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차별금지법 통과가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예상은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교분리라는 원칙 하에 세워져 있는 대한민국에서, 동성 부부를 보호하는 법을 기독교적 논리로 반대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고 실제로 굉장한 갈등과 논란이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신정정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 경계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어쨌든 원칙적으로, 기독교인이 차별을 지지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이해해주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학교들에서 채용이나 입학과 관련하여 학교의 건학 이념을 실현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을 염려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를 보면, 대체로 종교 학교라고 하더라도 종교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직책이 아니라면 종교를 이유로 채용에서 종교적 이유로 차별을 두는 것은 금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입학의 경우에는 사립 학교는 자율적인 반면, 세금을 받아서 운영하는 경우 정부의 지침을 따르도록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는 이 정도의 상황이 합리적인 중간 선이라고 생각한다.

1027 연합예배 배경에 대한 나의 몇 가지 반론들

첫번째는, 지난 100년간 대한민국이 거둔 성과들이 기독교인들의 기도 덕분이라는 인식이다.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런 역사 인식이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부정적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문제들 중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읽는다면,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신앙적인 평가와 역사적인 국가 번영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 고난을 받는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들이 번성하는 현실이 많은 선지자들의 고민의 주제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변방에서 짧게 활동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인생을 사셨다. 성공과 번영이 믿음의 결과라고 믿는 것은 아마도 욥의 세 친구들의 논리일 것이다.

이런 기독교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무엇인가가 잘 되었을 때 “그건 다 내 덕분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사회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남들로부터 “다 당신 덕분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아닙니다. 제가 한게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는게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태도이다.

두번째는. “점잖고 조용한 활동만으로는 대한민국 사회를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지양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평생의 스승이자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김교신은 <조선의 희망>이라는 제목의 이런 글을 남겼다.

부흥전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각처 교회에 영화(靈火)가 붙었다는 일이 반드시 조선에 희망을 초래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도 과거에 경험한 바이요, 사회 전반이 기독교적으로 변하여 상고(商賈)까지도 예수쟁이 행세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이 되는 일도 조선에 희망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은 서북지방에서 벌써 시험제(試驗濟)가 된 일이었다.

그 밖에 신학을 지원하는 청년이 많음이라든지 독립 전도(傳道)의 비장한 결심으로써 구령(救靈) 사업에 진출하는 이를 보았으니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일로써 희망이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학이나 전도에만 거룩함이 있고 갱생의 희망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다. 양돈과 양계에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산란의 일자와 계보의 정부(正否)를 속이지 말면서 성전(聖前)에서 행하는 일이면 다 거룩한 일이요, 희망이 전족(全族)에게 임하는 대사업이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 성취나 혹은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은 참패(慘敗)로써 세상을 마친다 할지라도 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노역하는 자면 우리의 희망은 전혀 그에게 달렸다.

비상시에 비상 수단을 쓰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비상 수단을 일상으로 계속 유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세상을 바꾸기에 불충분하다는 판단이 바로 인간적인 생각이다.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패배로 세상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참 믿음이다.

세상이 기독교적이었던 적이 있나? 성경적 원리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역할인가?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스스로 성경적 원리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로도 충분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한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는 꿈이지만 그 꿈을 믿는 것이다.

세번째는, 기도라는 이름으로 세를 과시하려는 태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정치적인 행위이다. 이 집회도 당연히 정치적인 집회이고, 정치 집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도록 독려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정치 집회의 목적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장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집회는 예배와 기도를 이야기한다. 백만명이 한 장소에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해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과시하려는 것이거나, 교회의 인원 동원 능력을 점검하려는 것이 아닐까?

1027 연합예배에 기대하는 것

교회 시설을 아이 돌봄 센터나 방과후 학습 공간으로 제공하는 일은, 교회가 가진 것을 사회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가진 조직력이 잘 발휘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전해주는 일이 되면 좋겠다. 북한 이탈 주민의 정착을 돕고 생활 안정을 지원하는 것 역시 지금까지도 잘 해오던 일이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헌혈 운동 역시 굉장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기금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서 이런 의미있는 사회적 공헌을 확대해 나가는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해내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일들을 굳이 크게 떠들 필요는 없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3-4)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교회가 하고 있는 좋은 일들을 교회 입으로 떠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도리어 이번 집회에서 어떤 방법으로 사회를 더 섬길 수 있을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좋겠다. 교회가 가진 힘과 능력이 더 낮고 소외된 곳에 있는 사람들을 향할 수 있다면, 그리고 누가 그걸 보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그걸 계속할 수 있다면, 그게 하나님이 지금 한국 교회에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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