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파리 올림픽 -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생각

이 블로그의 글들을 읽어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내가 사는 삶은 예수님을 닮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성정체성과 관련된 여러 가지 논란들이 있었다. 기독교계에서 보는 시각을 잘 요약해 주고 있는 기사가 “올림픽 개막식은 시작에 불과”…LGBTQ 선전에 '눈살이라는 제목으로 데일리굿뉴스라는 메체에 실린 것이다. 이 기사에서 언급하는 것들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겠다.

  1. IOC가 친동성애 시민단체인 ‘Fier Play’를 공식 협력기관으로 선정하고 기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 Fier Play가 주도하여 프라이드 하우스라는 성소수자 안내센터이자 쉼터를 운영하는데, 이곳은 동성애자들의 사교장이 되고 있다.
  2. 개막식에서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무대에서 레즈비언 DJ와 여장 남성인 드래그퀸들이 등장해서 선정적인 퍼포먼스를 펼쳤고, 사전 제작 영상에서는 세 명의 남녀가 한 방에 들어가 포옹한 뒤 야릇한 분위기로 문을 닫는 모습도 보였다.
  3. XY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난 남성인 이마네 칼리프와 린위팅이 여성 복싱 경기에 출전한다.

기사에 언급된 기독교계의 인사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나도 어제 주일 예배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으로부터 (위의 두번째 사실에 대한) 탄식과 우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게 기독교의 가치관과 과학자로서의 정체성 사이에 있는 긴장 관계는 사실 풀기에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 문제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어느 한 쪽이 100% 맞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가 다양한 층위에서 일정한 진실과 왜곡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 여러 가지로 토론을 하고 있는 큰 아들과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내용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1. 프라이드 하우스가 운영된다는 사실과 ‘그곳이 동성애자들의 사교장이 되고 있다’는 해석은 별개의 것이다. 나는 프라이드 하우스라는 곳의 운영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올림픽 운영을 위해 프라이드 하우스와 같은 곳이 필요한지의 여부는 조직위원회의 결정이겠지만, 나는 올림픽 행사와는 별개로 사회적으로 이런 곳이 필요한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2. 개막식 퍼포먼스가 문화 전쟁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이런 요소 이외에도 많은 부분이 논란이 되고 있을 것이다. 나도 개막식 퍼포먼스 전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 기사에서 언급된 것 이외에도 다양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 퍼포먼스는 현대 유럽 문화의 주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고 이것보다 훨씬 더 과격한 내용들이 전방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나는 이런 현대 유럽 문화의 주류를 즐기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3. 기사에서는 이 두 명의 복서를 ‘남성’이라고 썼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와 관해서 이 글을 참조하면 좋겠다. 이 글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에 대한 객관적인 의견을 담고 있다.) IOC는 선수의 여권을 기준으로 남성 여성 여부를 판단한다고 말하고 있고, 언급된 두 명의 복서들은 XY 염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 여성으로 태어나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너무 당연하지만, 이전에도 그들은 여러 대회에 출전하여 승리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했다. 세계복싱연맹이 이전에 그들의 대회 출전을 불허한 적이 있는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올림픽위원회와 세계복싱연맹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선수 성별 시비걸기’ 뒤에 푸틴 있다…친러 복싱협회 통해 ‘대리전’ 이 기사를 보면 세계복싱연맹이 올림픽위원회만큼 믿을만한 단체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성정체성이 매우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이라 믿으며, 그런 생각에 의하면 두 사람은 여성임이 명확하다.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이 ‘남성’이라 주장하고 싶다면, 기사 작성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남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XY 염색체를 가진 이들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나는 이 구체적인 논의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독교 정신의 대전제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에 있다고 생각한다. 율법이 말하는 고아와 과부를 향한 배려, 예수님이 이야기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모두 이런 대전제를 보여주는 것이라 믿는다. 다수가 소수를 배척하고 타자화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어긋난다고 믿는다. 성정체성과 관련된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라는 점에서, 이런 문제를 갖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은 이 소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포용하고 배려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죄로 인정하는 것이 먼저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나는 이렇게 반문한다. ‘당신들은 그런 감수성으로 동성애 이외의 어떤 죄와 싸우고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반문하는 것은 많은 다수들이 ‘자신이 다수에 속해 있는 것이 분명한 문제’에 있어서만 적극적으로 소수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동성애 이외에 수많은 죄악들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나 깨끗한 다수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 그 넓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내가 자신있는 분야에서 남을 자신있게 비난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태도가 아니다. 영적 전쟁은 자신이 가장 연약한 부분에서 싸우는 것이지, 내가 가장 자신있는 부분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행했던, 그리고 사도 바울이 비난한 비뚤어진 쾌락을 위한 동성애, 특히 폭력과 연관된 그것은 죄가 명확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모든 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이가 구원받았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기에 앞서서, 스스로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해야 한다. 죄가 없(어 보이)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인 세리가 더 의롭다고 예수님께 인정받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자리를 떠나간 후 (이 자리를 떠나간 사람들은 실로 양심적이다. 지금 같으면 기독교인들이 먼저 돌을 던졌을 것이다),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세상이 교회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일만 달란트 빚을 졌는데 그 빚을 탕감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해야 한다.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그 큰 용서를 물러달라고 떼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곳이라면, 더 포용하고 더 배려해야 한다. 교회가 손해보지 않으려고 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힘을 사용할 때, 사회는 교회가 그저 사회 속의 여러 주체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래서 교회는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누구나와 다를바 없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위선자로 욕을 먹는 것이다. 이게 바리새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할 수 있는 조항들을 열심히 찾아내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