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다와 틀리다
다르다고 말하는 것과 틀리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다른 말이다. 보통은 “다르다”고 말해야 하는 것을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을 지적하곤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틀리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을 “다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걱정이 된다.
사실 이 문제는 매우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같다 다르다도 구분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심지어 맞다 틀리다는 진리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앞 글 (우리는 파시즘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에서 링크를 달아둔 두 개의 사건은, 일론 머스크가 나치 인사를 한 것,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서부지방법원을 폭력으로 휩쓴 것이다. 공적인 인물이 나치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동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나치즘이 틀렸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합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 대통령을 등에 업고 있는 세계 최고의 기업가 중의 한 명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너희들이 맞다고 생각하는거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치즘이 맞다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그게 맞든 틀리든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서부지방법원을 폭력으로 휩쓴 세력들이 헌법재판소의 (아직 나오지 않은) 판결에 대해 상대화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법적으로 맞다 틀리다’의 최종 판단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법부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합의이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과거에는 진보세력이 사법부의 판단을 의심하는 주체였다. 엄정한 공권력이라는 말을 쓰는건 군사정권이었다. 이제 그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게 된 이 상황은, 사람들에게 ‘맞다 틀리다’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고 ‘내게 유리한가 불리한가’의 구분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관점에서 ‘맞다 틀리다’는 철학적인 문제여서 매우 어렵지만 ‘법적으로 맞다 틀리다’는 그에 비해서는 실질적으로는 큰 이견이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와 같은, ‘-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것이 필요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필요한 인생을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창세기에 의하면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 원하는 첫번째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선이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죄이다. 하나님은 (어떤 이미지도 아닌) 말씀으로만 만나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선악은 언어로 이해될 수 밖에 없고, 이런 측면에서 ‘맞다 틀리다’도 언제나 언어의 문제이다.
‘법적으로 맞다 틀리다’ 역시 언어의 문제이고, 그 언어의 해석 권한을 특정 소수의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 법치주의이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에 가깝고, 그런 면에서 ‘법치주의’는 고육책에 가깝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사회가 기능할 수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동의가 필요하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인정하는 동의의 지점이 어떤 것인지가 중요하다. 나는 이 지점이 ‘차별’과 ‘폭력’을 거부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장이든 상관없이 그것이 ‘차별’ 또는 ‘폭력’을 불러온다면 반대하겠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예수님이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반대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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