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와 독재,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뉴욕 타임즈 기사와 외국의 친구들로부터 받은 이메일 덕분에 계엄령이 martial law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군대가 행정과 사법을 모두 장악하는 것이니 martial이라는 단어를 쓰는게 이해가 된다.
2024년 12월 3일 늦은 저녁에 일어난 비상계엄 선포는 약 세 시간만에 국회에 의해 계엄해제가 결의되면서 정당성을 잃었고, 12월 4일 새벽에 공식 해제되었다. 그리고 12월 14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에 의해 탄핵됨으로 인해 끓어오르던 민심은 두번째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 뉴스를 거의 보지 않지만, 이 열흘 정도 기간에는 많은 뉴스 프로그램을 봤다. 시사 프로그램들도 평소에 보던 것의 수십배에 달하는 양을 본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교활하게 생존해온 ‘국민의힘’의 역사! (강추)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라있는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의 이야기였다. 아직 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내용이다.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은, 국회가 계엄령 해제에 실패했다면, 이 계엄령은 언제 어떻게 해제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계엄은 비상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대에 행정과 사법의 권한을 모두 부여하는 행위이고 군대는 (그런 권한을 갖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므로) 이 권한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데, 이 권한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법과 절차를 무시할 수 밖에 없고 이런 행위들은 계엄이 끝나고 나면 범죄로 비난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쟁이나 내란과 같은 상황이 주는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사회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계엄이 주는 상처가 용인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계엄령 선포와 같이 정치적 목적으로 선포된 계엄(선포의 이유를 야당에게서 찾은 대통령의 첫 담화가 이 정치적 목적을 잘 보여준다)은 사회의 붕괴를 막는 순기능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계엄의 범죄 행위들이 주는 상처를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정치적 파장을 감당할 수 없다면 결국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범죄들을 사면받을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필요하게 되고, 결국 그것은 독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전우용 교수의 이야기였다.
여의도 앞에서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들고 모인 시민들을 포함하여 70%가 넘는 국민들은 이 사건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고, 그래서 뜨겁게 뭉쳐서 실질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왜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내가 서평을 올린 적이 있는 한국인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비상계엄 선포 해제에 참여하지 않은, 그리고 대통령 탄핵에도 반대한 정치 세력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사상의 근원은 무엇일까? 70%가 넘는 한국인들이 이 사건을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면, 우리 사회 안에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사상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전우용 교수는 그걸 뜻밖에도 왕당파 또는 엘리트주의로 이야기한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크기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라면, 왕당파이든 엘리트주의이든 그에 대립되는 사상은 누군가가 더 많은 크기의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왕이 지배하는 절대왕정은 필연적으로 귀족을 요구할 수 밖에 없고, 귀족은 다른 국민들에 비해 더 많은 특권을 갖기 때문에 귀족이라고 불린다. 스스로를 귀족이라고 보고, 자신들이 민중에 비해 더 많은 권력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정치 체계를 공화제로 선포했기 때문에, 친일을 했던 대한제국의 고위층들은 대한제국 황제와 일황 중에 누구를 섬기느냐 하는 문제보다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하게 된 것이 1990년에 이르러서라고 말한 부분도 내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내 중고등학교 시절은 전교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그런 면에서 내가 중고등학교 동안 받았던 교육 역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분들은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실제로는 군부 독재를 정당화하는) 민주주의를 교육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동일한 주권을 갖는다는 생각은 대단히 급진적인 생각이기도 하다. 실제 사회는 그렇게 동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사회에서는 많은 요소에 의해 개인의 영향력은 큰 차이를 갖고 있고, 이것은 사회 체제나 이념과 상관없이 언제나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주권을 갖는’ 이상적인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믿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급진적이기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평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를 사회민주주의라고 본다면 이것이 진보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공정’이라는 개념에 대해 굉장히 집착하는 한국인에게 이 부분은 더욱 민감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관찰한 사실로부터 귀납해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 아니기 때문에 사상적인 배경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사상적 배경을 가질 수 없으니 정치적인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다. 다만,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 대결의 기저에 사상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그 대결의 양상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상에 집착하는 것은 근본주의자가 되는 지름길이니, 이상과 현실을 조화하기 위해 타협하다보면 그 바탕이 되는 사상이 다르더라도 합의하고 양보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공존하는 사회를 위해 더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서 있는 사상적 바탕을 부정하거나 언어를 비틀어 숨기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모르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알고서도 일부러 그런 경우도 있을테니 더 안타까운 일이다.
비상계엄 선포에 대한 옹호, 대통령 탄핵에 대한 반대의 기저에는 다양한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그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게 내 문제인지 아니면 그 생각을 논리있게 제시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시인지 모르겠다. 70%가 지지하는 생각이니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서, 양측의 생각과 의견을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제시하는 것을 듣고 판단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런 과정이 살아있어야 관용적인 사회가 될 수 있을텐데, SNS가 그 과정을 촉진하는 대신 짧고 선명한 진영논리와 흑백논리만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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