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은 베토벤 교향곡 9번과 함께

이제 어느덧 2020년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때이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2020년은 COVID-19와 함께 시작해서 함께 마무리를 하고 있고, 이전에는 겪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힘들게 적응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고 일년 내내 이와 관련된 많은 이벤트들이 기획되어 있었지만, 사람이 모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유야무야 흘러가게 되어 버린 듯 하다.

나는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베토벤의 음악 속에 들어 있는 그 낙관적인 생각을 좋아한다. 하이든은 깊이가 부족하게 들리고 모짜르트는 밝음 속에 들어 있는 비관과 씁쓸함이 아쉽고, 베토벤 이후의 유명 작곡가들인 브람스나 브루크너, 말러 같은 작곡가들은 내게는 지나치게 엄숙하다. 베토벤이야말로 치열하지만 낙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작곡가인 것 같고 그게 내가 베토벤의 음악을 즐겨 듣는 이유이다.

연말이 되면 많은 곳에서 송년 음악회를 하게 되는데 아마도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이 바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일 것이다. 사실 이 음악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음악이니까. 교향곡이라는 장르에 인간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넣은 시도이기도 했고, CD의 물리적인 크기를 120mm로 정한 이유가 이 곡의 녹음을 한 장에 넣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게 정설인 줄 알았는데, 영문 위키피디어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곡이 베토벤이 완전히 청력을 상실한 이후에 작곡한 것이며, 이 곡의 초연 당시 베토벤이 청중의 박수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지난 12월 20일 오후에 유튜브를 통해 서울시립교향악단이 Markus Stenz의 지휘로 이 교향곡을 연주하는 실황이 중계되었다. (아쉽지만 이 공연은 현재 유튜브에 남아있지 않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전체 오케스트라가 아닌 소규모 편성으로 연주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야코 쿠시스토가 편곡한 버전을 사용하였다. 관악을 제외한 모든 연주자와 솔리스트들, 그리고 합창단원들까지 마스크를 쓰고 연주를 진행하였으며 관객은 당연히 없는 상태에서 공연이 진행되었다. 일요일 오후에 핸드폰으로 보는 유튜브였지만 소규모 편성이다보니 도리어 곡의 구조가 잘 파악이 되는 장점도 있었고, 테너 솔리스트였던 박승주 테너의 솔로가 역대급으로 좋아서 참 감동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국립합창단이 전체 곡을 외워서 연주를 했는데, 사실 중간에 합창의 템포가 지휘자를 압도해서 빨라지는 지점이 있었던 것이 아쉽긴 했지만, 그건 사실 많은 실황 공연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라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CD 녹음 중에서는 조지 셀이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1968년에 녹음한 것을 제일 좋아한다. (이 음반은 사실 인접 저작권까지 만료가 되었기 때문에 CD를 보유하고 있다면 리핑을 해서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는 고클래식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은 것을 듣고 있다.) 베토벤의 고뇌와 순수한 기쁨이 잘 드러나 있는 연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9분 23초이니 최근의 음반들에 비하면 좀 느린 편이기는 한데 그게 내게는 급하지 않아서 좋다고 생각하는 장점으로 작용을 했다. 이 연주가 참 좋은 연주이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기는 하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연주는 아닐 수도 있다. 게다가 클래식 음악 연주는 악보와 함께 보면서 듣는 것이 가장 좋은데, 한 시간이 넘는 교향곡의 총보를 본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걸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Beethoven’s 9th Symphony라는 제목의 아이패드 앱이다 (아이폰에서도 사용 가능함). 앱 자체는 무료이지만 무료 버전에서는 2악장 짧은 부분만 들을 수 있고 5,900원 ($4.99) 인앱 결제를 하면 모든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모두 4종의 연주(1958년 프리차이 베를린 필, 1962년 카라얀 베를린 필, 1979년 번스타인 빈 필, 그리고 1992년 가디너 혁명과 낭만의 오케스트라)를 악보와 함께 들을 수 있고, 13명의 사람들이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해 이야기한 인터뷰를 볼 수 있으며 David Owen Norris가 쓴 글(베토벤의 인생, 교향곡 9번에 대한 설명, 감상법, 그리고 악보 관련 이야기)을 읽을 수 있다.

앱의 첫 화면
실시간 악보와 함께 감상
심지어는 베토벤 자필 악보도 볼 수 있다
다양한 인물들 (지휘자, 연주자, 기자, 평론가 등)의 이야기
David Owen Norris의 글을 읽을 수 있다

이 정도의 퀄리티 있는 앱을 만들어낸 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보니 역시나 도이치 그라마폰이다. 그저 감사함으로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인앱결제를 지불하고 인류가 남긴 최고의 작곡가인 (혹은 최소한 최고 중의 한 명인) 베토벤의 걸작을 여유있게 감상하는 것도 연말을 보내는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위에 언급한 인터뷰 중에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한 이야기가 내 마음 깊은 곳에 전달이 되었다. 그가 이 인터뷰를 했던 1979년의 시점에서 봐도 순수한 인류애, 평화 이런 단어들이 무색해 보일 정도로 전쟁과 대립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진단은 그로부터 4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수천년 동안 이런 평화에 대한 갈망은 지속되어 왔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완성되지 못했다고 해도 그 희망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베토벤은 이 희망을 노래하고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감동적이다.

코로나19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파괴하고 있는데다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그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런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과 낙관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베토벤이 지금 이 순간 그의 교향곡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