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올해의 스무번째 책은 파이 이야기이다. 집 근처에 이랜드그룹에서 운영하는 2001 아웃렛 매장이 있다. 걸어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가끔 들러서 장을 보곤 한다. 여기 지하에 반디앤루니스매장이 있고, 그 바로 옆에 북스캔매장이 있다. 대학시절에 해외 북클럽에 가입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영어로 된 책만 구입을 할 수 있었던데다가 지불을 위해 현금이나 수표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오래 하지는 못했었다. 올해 책을 50권 읽기로 결심 을 하고 독서를 하다보니 괜히 책을 많이 사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처음에는 읽어야 할 좋은 책을 선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기 때문에, 몇 번이고 고심을 하다가 북스캔에 회원으로 가입을 했다. (사실, 이 베텔스만이라는 회사가 <다빈치 코드>의 출판사라는 점에서 망설인 부분도 있다) 처음 회원으로 가입을 하면 일부 대상 도서 중에 3권을 만원에 구매할 수 있고, 대신에 1년에 책을 네 권 구입하는 조건이다. 그 때 가입시에 고른 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파이 이야기>라는 책이다.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어가고 있는 중에, 우리 교회의 청년 중 하나가 이 책을 들고 교회에 온 것을 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다른 자매가 "이 책 재미없던데..."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한참 재미있게 읽던 중이라 "그래? 나는 재미있던데..." 하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의 이름인 피신의 유래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별명을 파이(Pi)라고 짓게 된 경위하며 동물원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세 가지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만 해도 읽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는데, 파이가 드디어(!) 바다에 표류하게 되면서 책에 몰입하는 정도가 높아지고 자연스럽게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벵골호랑이 한마리와 구명보트를 나눠타고 있는 인도 소년의 이야기. 어쩌면 로빈슨 크루소나 백경같은 전형적인 모험 소설의 일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내용을 가진 책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 결국은 사람의 삶에 대한 의지 , 삶의 숭고함 같은 미덕에 대한 성찰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두 명의 일본인에 의해 조사를 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일본 국적의 배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 도무지 파이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두 명의 일본인에게 파이는 그들이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하나 더 말해준다. 이 부분에서 나는 혼란을 느껴야 했다. 과연 파이의 이야기는 진실일까? 어쩌면, 파이가 지어낸 (혹은 지어냈다고 독자들이 생각하는) 그 이야기가 진실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리어 인간이 극한 상황 속에서 얼마나 인간성을 쉽게 버릴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선과 악의 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덕목들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없이 악하고 무서운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란, 이런 양면성의 존재라는 모순 속에서 유지되는 위태로운 줄타기일지도 모른다. 이 줄타기를 인지하지 않는 양 극단에서 모두 공통적인 비인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