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수준

내가 구독하는 팟캐스트 중에 김동호 목사의 작은 이야기라는 것이 있다. 김동호 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들어본 것은 단 한 번 뿐이지만, 그분에 대한 이야기나 소식, 그리고 그 분이 쓴 책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또 경험을 한 터라 한국 기독교계에서 나름대로 존경을 받으실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요즘 들어서는 한 두 주 정도씩 팟캐스트가 올라오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오늘 그리스도 고난에 참여하는 자라는 제목의 설교말씀이 올라왔다.
장면 1. 중세 교회. 큰 성당을 짓기 위해 교회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팔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본인의 죄만을 용서해준다는 면죄부를 팔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대담해져서 죽은 사람을 위한 면죄부까지 팔기 시작한다. "당신의 헌금이 헌금 주머니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그 순간, 당신의 어머니(혹은 아버지)는 연옥에서 천국으로 가시게 된다"는 말과 함께. 장면 2. 미국 수정교회의 건축 당시. 일정액 이상의 건축헌금을 내는 사람들에게 각각 동메달, 은메달, 금메달을 준다. 그리고 그 이상 큰 헌금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따로 공간을 마련해서 이름을 새겨준다. 아예 대놓고 모금운동을 하는 것이다. 장면 3. 어느 한국 교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목사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설교가 행해진다. 예수님을 사랑하니 헌금으로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사용되는 교회가 수백억의 돈을 들여 만들어진다.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일정액의 돈을 걷어서 교회에 뭔가 선물을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게 싫다고 하더라도 혼자만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승진(?)하는 마당에 믿음없는 일을 해서는 되겠는가. 장면 4. 또다른 한국 교회.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헌금"이나 "헌신"에 대한 설교를 잘 하지 않는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해서 칭찬을 하지도 않고, 직분을 맡게 되었다고 해서 억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래서 이 교회를 Cool하다고 표현한다.
김동호 목사님의 고민은, 도대체 이 네 가지 장면에서 다른 점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일면 Cool 해보이는 장면 4의 교회가 실제로 장면 3의 교회보다 헌금이 훨씬 적게 나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축복과 헌금을 맞바꾸기 위해 헌금을 많이 하는 것"과 "축복과 헌금을 맞바꾸려 하지 않기에 헌금을 많이 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믿음은 무엇인가. 헌금의 크기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이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 봐도 돈을 많이 낼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뜻인 것도 같다. 돈의 절대적인 크기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돈의 상대적인 크기는 분명히 믿음과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믿음이라는 말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삶의 어느 한 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와 닮아있는가 하는 것이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금을 많이 하는 것도 분명 좋은 믿음의 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마음으로 헌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자신의 믿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지 않고 이 세상을 살고 있으면서 교회에 내는 돈이 "자신의 심리적인 죄책감을 줄여주는 값싼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돈이 어떻게 사용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항상 "물질적인 것"으로 축복하시는 분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욥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가장 부합되게 사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 아닌가. 예수님의 삶은 가장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었지만 잠시의 영광도 채 누려보지 못한 채 비참하고 처절한 실패로 마무리되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삶은 잊어버린채 "세상에서 잘 사는" 축복에 눈이 멀어 있다면, 그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신앙의 수준은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가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쳐다보지 않는 신앙의 열정은 미안하지만 모두 금송아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