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권력의 거리에 대한 생각
최근 미국 텍사스주 교육위원회가 공립학교 교육과정에 성경 이야기를 의무 독서 목록으로 포함하는 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뉴스는 단순히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반가운 생각보다는, 도리어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과 깊은 우려를 갖게 만든다.
Q1. 기독교인에게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친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 아닐까?
A1.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성경의 가치가 전해지는 것은 언제나 바라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공교육 시스템’이라는 국가의 제도적 강제력을 빌릴 때는 조금 다른 차원의 고민이 시작된다. 복음의 본질은 자발적인 회심과 영적 결단에 있을 텐데, 제도의 틀 안에서 의무로 주입되는 성경이 과연 아이들에게 참된 신앙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다. 자칫 영성을 잃어버린 채, 그저 하나의 사회적 규범이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이유다. 아마도 기독교 재단의 사립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말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나도 연세대학교의 채플 시간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눈으로 보고 경험해 본 적이 있다.
Q2. 종교가 제도나 권력과 가까워질 때, 역사적으로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
A2. 이 고민은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다. 이미 1,600년 전,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도성》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과 유한한 ‘땅의 도성’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그 어떤 지상의 권력이나 국가도 결코 하나님의 도성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경고였다.
프랑스의 사상가 자끄 엘륄(Jacques Ellul) 역시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권력을 쥐게 된 순간을 가장 아쉬운 장면으로 꼽았다. 낮고 소외된 곳에서 세상을 감화시키던 복음이, 제국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되는 ‘뒤틀림’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번 텍사스의 결정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그 뒤틀림의 또 다른 연장선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Q3. 하지만 기독교인이 세상의 교육이나 정치를 더 선하게 변화시켜야 할 책임도 있지 않나?
A3.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을 ‘세상 일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많은 사상가가 이 땅의 제도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가깝도록 가꾸는 것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보았다.
다만 본질적인 우려는 그 ‘방법’에 있다. 참된 변화는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 세상에 자발적인 감동을 주는 방식이어야 할 텐데, 오늘날의 흐름은 복음 자체의 능력보다는 법과 제도라는 ‘권력의 힘’을 빌려 양적 확장을 이루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은 낮아짐과 자기를 비움(Kenosis)이었고, 권력을 통해 특정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원대한 꿈도 중요하지만, 내가 먼저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실존적인 결단이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세상 변혁의 꿈은 이 실존적인 결단 뒤에 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실존적인 결단을 한 사람이 세상 변혁의 꿈을 단체의 힘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이루려 할 수 있는 것일까?
Q4. 지금 미국의 기독교 내부에서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A4.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보수 복음주의 목회자의 아들인 팀 앨버타(Tim Alberta)는 그의 책 《나라, 권력, 영광》에서 현재 미국 보수 교계가 마주한 위기를 적나라하게 짚어낸다. 주기도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고백이, 미국이라는 지상의 나라에서 권력과 영광을 쟁취하려는 당파적 욕망으로 오도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텍사스의 성경 의무화 표결 역시, 신앙이 정치적 영역 확장의 도구로 소비되고 있는 미국 교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교회가 정치적 당파성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설명한 그의 글을 읽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은, 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정체성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점이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이미 정치적인 당파성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 처해 있다.
Q5. 이 흐름이 멀리 있는 한국의 기독교 대안학교 현실과도 연결될 수 있을까?
A5.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보수 교계는 미국의 신학적·정치적 흐름에 큰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교회가 세운 여러 대안학교들이 공교육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본래의 순수한 목적을 잃어버린 채,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하거나 편향된 이념을 주입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미국 텍사스의 이번 결정이, 한국의 일부 세력에게 “미국도 공교육에서 저렇게 하지 않느냐”라는 식의 잘못된 명분과 정당성을 쥐여주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신앙 교육이라는 이름 뒤에 이념의 칼날이 숨어드는 현상을 우리는 얼마나 분별해 내고 있을까.
Q6.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남겨야 할까?
A6. 교회가 세상의 법과 제도, 강제력을 동원해 영향력을 넓히려는 모습을 볼 때마다 깊은 쓸쓸함이 남는다. 복음은 세상 권력의 비호를 받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낮아짐을 선택할 때 가장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 권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곳이 아니다. 세상 권력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세상을 부끄럽게 만드는 곳이다.”
자끄 엘륄이 던진 이 오랜 경고가, 오늘날 미국과 한국 교회의 현실 위로 묵직한 질문이 되어 흐른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땅의 권력을 구하고 있는가.